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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pr 24. 2024

교사 바이브

"'그렇게 입으시니까 꼭 선생님 같아요!'라는 말이 나는 정말 싫어!"라고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말 예쁜 옆 학교 선생님이셨다.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을 하곤 했는데 그때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오셔서 특강처럼 가르쳐 주시곤 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의 옷은 하얀색 쉬폰 원피스에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아기자기하고 여성미가 넘치는 옷으로 기억한다. 유독 그 옷을 입으면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서 '선생님처럼 보인다'라는 말이 참 맘에 안 든다고 하셨다.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그리고 6년쯤 뒤에 내가 선생님이 되었다. 그런데... 교사가 되고 나니 갑자기 나도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처럼 옷을 입기 때문이 아니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선생님들끼리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일찍 나와서 같이 오후 시간을 보내는 때가 있었다. 3시 정도 되는 낮 시간에 카페나 영화관에 나이도 다양하고 80퍼센트가 여성인 그룹이 있으면 대개는 선생님들이었다. 그때는 그 정도로 구분이 되었는데 이제는 길을 가다가도 '아! 이 분은 선생님이다!'라는 '삘'이 팍 오는 것이다. 내 친구는 그것을 일컬어 'teacher vibe'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많든 적든, 경력의 길이 유무와 상관이 없이 교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아우라가 있다는 것이다. "서... 설마 나도???" "야. 너 농담하냐. 너 백퍼 누가 봐도 선생님이야." 아아니..... 왜 갑자기 좌절스러운 기분이 드는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유일하게 교사처럼 안 느껴지는 선생님 하나는 매번 오후마다 교실에서 졸고 있던 젊은 남자선생님이었다고. 그래. 기억난다. 열이 팔팔 끓어오르게 만드는 추억과 함께. 일할 사람이 귀했던 이전 학교에 신규인 듯 신규가 아닌 남자 선생님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온 것이다. 남자 신규 교사들은 대체로 환영을 받는다. 열심히 일할 사람으로 적격이라는 기대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기대에 차 있었다. 1정 연수까지 받고 나니 생활부장과 학년부장의 자리까지 맡게 되었는데, 정말 그때도 조금은 느꼈다. 일을 참 안 하는구나. 보통은 교육과정은 학년부장이 짜서 주지만 그것도 다 내가 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 생활부장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갑자기 뒷골이 땅기면서 혈압이 오르니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하여간 업무 인계도 그렇고 그전 해 서류도 하나도 정리하지 않은 채 개인정보들이 가득한 보안관 채용 서류들을 그대로 준 것부터 굵직굵직한 것만 떠올려도 만화에서 나오는 '빠직' 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다.


아무튼 이 교사 바이브가 구체적으로 뭘까 생각해도 두리뭉실했는데 이것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의 예를 생각해 보니 확연하게 보이는 것 같다. 정말로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던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도맡아서 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은연중에 그 윤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온몸으로 풍겨나고 있겠지. 얼마 전에 새로 봄 트렌치코트를 하나 장만했는데 그 옷을 본 우리 집 아이들이 말했다. "반품이 좋겠어요." "왜?" "꼭 그 뭐시냐 스카이 캐슬에 나오는 그 아줌마... 맞다! '쓰앵님'처럼 보여요!" 급 현타가 왔다. 진짜로? 거울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흑. 진짜로 반품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날씬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그 디자인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올라오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오는 동선이 달라졌다. 그런데 교실에 와서 확인하니 3분의 1이 안 보인다. 밥을 천천히 먹는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ㅊㅇ이가 말한다. "선생님! 빨리 급식실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몇 명이 서로 뛰어다니고 통제불능이에요!"  물론 나는 즉시 달려가지 않았다. 건물 두 개를 가로지르고 4개 층을 내려가서 가 봤자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중간에 동선만 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뒤 ㅈㅎ이가 풀 죽은 모습으로 조심조심 들어온다. 상황을 파악하니 ㅈㅎ이가 ㅇㅅ이를 놀렸고 ㅇㅎ이는 이에 ㅈㅎ이에게 반격하고 도망을 갔고 그러자 ㅈㅎ이는 또 ㅇㅅ이를 쫓아서 급식실을 종으로 가로질러 질주한 모양이다. 잠시 뒤 해맑은 모습으로 들어온 ㅇㅅ이의 말도 크게 다르진 않았고 둘은 선선히 잘못을 수긍했다. 사실 애교스럽게 울먹이는 시늉을 하는 ㅇㅅ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빵 터질 뻔했지만 애써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렇잖아도 요새 슬슬 자유로움을 표출하려고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좋은 기회라고 내심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내일은 과학체험한마당이 준비되어 있어 아이들은 즐겁게 다양한 과학실험을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의 짧은 연설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그냥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반복의 힘은 무시 못한다.


그리고 이 반복의 힘은 아이들에게도 적용되겠지만 교사인 나에게도 동시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어찌 경력 20년이 넘어가는 나에게 교사 바이브가 형성이 될 수밖에. 아아.... 나는 좀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선천적인 것에 더해서 후천적으로 직업까지 이렇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뭐 그래도 이미 익숙해진 거. 잘 도닥이면서 데려가 보자. 쓰앵님보다는 덜 쓰앵님처럼 보이면 되는 거 아닌가. 결국 옷은 반품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교사 바이브가 나를 장악해 버려서 옷을 고르는 안목조차 좌지우지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 이쁘면 된다고 애써 합리화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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