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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pr 23. 2024

글씨가 뭐길래

"잘했네! 이렇게 잘 쓰면서!" 경쾌하게 칭찬을 하면서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ㅇㅎ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ㅇㅎ야 왜 그래?"하고 물어보았다. ㅇㅎ는 글씨를 다시 써 오기가 싫었다고 말했다. 자기가 볼 때는 고쳐온 글씨나 원래 썼던 글씨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전에 어떻게 써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순간 멍 해졌다. 왜냐면 오늘은 글씨를 바로 잡는 날로 미리 이야기를 하고 반 이상 다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다고 ㅇㅎ의 글씨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늘만 해도 일기를 보면 어제 분명히 다시 써온 세줄 쓰기의 글씨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세줄쓰기 검사를 다 끝낸 후에 ㅇㅎ를 다시 불렀다. 아이는 글씨를 다시 쓰는 것이 정말 싫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다. "선생님이 ㅇㅎ 얼굴 확인하고 다시 써 오라고 했어 아니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글씨만 보고 다시 써 오라고 했어?" 그 말에 아이는 얼굴을 보지 않고 다시 써 오라고 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ㅇㅎ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가 아닌 순수하게 글씨만 봤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다 돌아가서 다시 써 온 거 알고 있지?라고 묻자 아이는 또 울먹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악필이다. 나도 글씨를 잘 쓰는 게 참 어렵다. 제일 곤란한 것은 아이들 일기장에 몇 줄씩 답장을 써 줄 때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기 위해서는 정성을 한가득 들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일기 검사는 하루 종일 해도 끝나지 않는다. 빠르게 써도 1시간은 꼬박 걸리기 때문에 최대한 반듯하게 쓰려고 정말 갖은 힘을 다 쓴다. 어릴 때는 학기마다 있는 경필 쓰기 대회가 정말 싫었고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참 힘들었다. 워드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정말 위대한 발명 중의 하나임을 생각하며 날마다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보니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아이들은 본인들의 일에 충실했고 성실하면서 꼼꼼한 자세를 지닌 아이들이었다. 글씨를 쓰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없지는 않다. 학부모님들의 글씨를 보면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가늠하기가 조금 더 쉬웠다. 명필은 아니더라도 꼼꼼하게 눌러쓰신 글씨 속에는 아이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 들어 있었고 그만큼 그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 네 명의 환경조사서를 일일이 수기로 쓰려면 사실 힘이 드는 건 사실이고 뒤로 갈수록 대강대강 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은' 했다. 결과물이 그 노력만큼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예쁜 글씨, 반듯한 글씨를 학기 초에 조금 더 신경 써서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은 당연히 싫다. 나도 매번 할 것은 아닌지라 가끔씩만 했는데 이번 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어머니들의 반응이 매우 호의적이었다. 남겨서라도 글씨를 쓰게 해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고.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한 번씩은 알려준다. 의외로 어떻게 써야 글씨가 반듯하게 보이는지 방법을 모르는 친구들도 많아서 ㄹ, ㅅ 과 같은 글자를 예쁘게 쓰도록 하나씩 알려는 준다. 그 순간에 반영은 되지만 물론 다시 돌아가 버린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알려줄 때는 알려준다. 이렇게라도 손근육을 키우고 써 봐야지 나중에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를 다시 써오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아이들도 너무 힘드니까 둘째 줄, 셋째 줄 여기부터 여기까지 정도로 제일 심각한 부분만 다시 써 오라고 표시를 해 주면 대부분 안타까워하면서도 수긍을 한다. 어쨌거나 ㅇㅎ의 눈물을 보고 나니 물론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미안하다 ㅇㅎ야. 선생님이 악필이라서 너네만이라도 안 악필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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