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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pr 27. 2024

못하니까 계속한다

"여울이는 한 가지를 끈기 있게 하는 것을 못 봤어."

"하도 여러 가지를 하니까 정말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아빠가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맞다. 인정한다. 나의 관심사는 이리저리 휙휙 정말 자주 바뀌었다. 내가 봐도 금세금세 빠져들고 금세금세 싫증을 느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그만큼 또 금방 바뀌었다. 보통은 3개월 정도 지속되고 그 기간을 넘기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제일 먼저 열과 성을 다한 것은 종이 접기로 어른도 접기 힘들어하는 것들을 책을 보면서 고민하고 고민하다 보면 할 수 있었다. 붓꽃과 장미꽃을 접게 되자 웬만한 것은 되었다 싶어 흥미가 사라졌다. 지점토에 빠졌을 때는 각종 틀부터 도구까지 다양하게 모아두고 관련 자료는 복사해서 파일에 끼워두면서 반복해서 만들다가 역시 어느 정도 작품의 완성도가 생기는 것 같자 그만두었다. 주름종이 인형에 반했을 때는 고가의 주름지를 사고 종이 철사를 사서 열심히 만들다 역시 끝을 보았다. 주로 뭔가 만들어 보기를 좋아했는데 어떤 틀에 맞추어지는 것들이 하기 좋았던 것 같다. 반면 창작해 내야 하는 것들, 특히나 그림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데생은 그럭저럭 하겠는데 디자인이나 풍경 수채화 같은 것은 나만의 것을 만들지 못해서 한숨만 나왔다. 


그랬던 내가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과 피아노를 치는 것, 그리고 글쓰기와 책 읽기.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외국어 공부 정도. 모두 다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것이었다. 


별은 맨눈으로 관측하는 안시관측을 좋아했지만 망원경과 쌍안경을 사용해도 언제나 관측하는 것은 모두 늘 불확실성이 동반되는 것들이었다. 하늘의 습도와 구름 상태, 그리고 달의 모양과 밝기까지 영향을 미치니 늘 나를 애태웠다. 저기에 구상성단이 있는 것을 있는데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듯 잡힐락 말락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확연히 들어오는 그 순간의 감동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공부하다 지치면 하늘에서 청량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두근거림을 느꼈다. 도시에서는 별을 보기 어렵다고 하지만 오히려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주요한 별자리를 익히면서 저기 광해가 가려서 보이지 않을 다른 딥스카이들과 자잘한 별들의 위치를 마음에 그리면서 잘 기억해 두었다가 시골에 가게 되면 꼭 맞추어 보았다. 장소와 시간의 제약이 오히려 더 간절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음악은 늘 나를 애태웠다.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겐 음악적인 감각이 없다. 박자감도 음감도 테크닉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찌 되었건 조금은 치는 기술조차 모두 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연습을 해도 그냥 한 번 쓰윽 악보를 보고 만들어내는 동생의 음악을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하면 딱딱하고 때리는 것 같은 음악도 동생이 연주하면 분명 나보다 서투른 것 같은데 마음에 스며드는 감동이 있었다. 그림도 그랬다. 별 것도 아닌데 동생이 만들어내는 디자인이나 그림들은 다 괜찮았다. 좋은데 안 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다. 예체능에 뛰어난 동생을 보면서 스스로를 비교하게 되는 마음은 정말 어찌할 수 없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고 1 때까지도 날마다 열심히 치는 아이는 나였지만 정작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초등학교 때 일찌감치 피아노를 관두었던 동생이었다. 동생은 딱히 간절하게 원치도 않았지만 친정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고민하시다가 동생에게 작곡 공부를 시키셨고 동생은 반수만에 국립대 음악교육과에 합격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하는 사람 위에 천재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셈이다. 동생은 엄청난 천재라고도 할 수 없으니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한 박자 이상 수월하게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피아노를 오늘도 치고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오늘도 영어 공부를 한다. 아마 내가 뭐든지 쓱쓱 그림을 잘 그려내고 뭐든지 착착 음악적 감수성을 잘 표현하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면 이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으로 하는 것이 둔해서 한참을 해도 본전에 못 미친다. 그래도 놓지 않고 계속하는 순간, 불현듯 다가오는 그 기쁨과 나만 아는 0.0001보 정도 되는 전진이 있을 때가 있다. 물론 후퇴하기도 하고 매너리즘이나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도 있다. 알고는 있는데 이만하면 되었어라는 스스로 합리화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나를 지속하게 하는 힘은 결핍과 부족이다. 못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연습하면서 나가는 것뿐. 굳이 오늘 이렇게 못함을 강조하는 글을 길게 쓴 것은 오늘도 피아노 레슨에서 엄청 깨지면서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자세히 가르쳐 주다 못해 하나하나 붙잡고 떠 먹여줘도 잘 못 받아먹는 나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하지만 그래도 얼굴에 철판 깔고 계속 다니면서 연습을 한다. 어쨌거나 작년보다는 나아진 것이 분명하니까.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고 했지.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쳐 봐야 하는데 결혼 전에 비하면 절대적인 시간량과 신체적 에너지는 확실히 부족하다. 그래서 더 느릿느릿 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단 시간 내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냥 그대로 갈 뿐이다. 부족한 대로, 모자란 대로, 못하니까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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