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울 Apr 29. 2024

마음 닿기 참 쉽지 않다

"아니이! 나는 억울하다고오!!!!"

급기야 둘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일주일 전.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고 난 자리를 정리하지 않은 채 학교에 가기 바빴고 신랑은 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주 일요일 저녁에 이렇게 정리를 하지 않고 등교를 하면 너네가 사용하는 전자기기를 압수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억울함을 항변했다. 언니가 먼저 정리해 놓고 가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는데 왜 나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신랑은 물었다. "그러면 너네 생각을 이야기해 보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큰 딸이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리를 안 한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ㄷㅇ이가 못했으니까 내 잘못이 맞다. 하지만 한 번만 봐주면 이번엔 정말 잘해 보겠어요." 그런데 신랑은 또 말했다. "지금 그 상황이 반복이잖아. 둘이 다 같이 책임을 져야지." 


이 부분에서 나도 아이들도 모두 마음이 상해버렸다. 신랑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갈등상황이 생겨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야기를 하면 정작 듣지는 않고 본인의 원래 의견을 다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용기 내어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거듭되었고 이는 조금씩 쌓여서 결국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와 반복되던 패턴이 이제는 딸들과 반복이 되는 것이다. 둘째가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해도 신랑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안 한 것은 사실이잖아."


그래서 아무리 내가 상황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일이 아이들 중간고사라는 점이었다. 시험 공부하기에도 마음이 급한 시점에 전자기기를 압수하는 문제로 한 시간 가까이 입씨름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의 속은 더 까맣게 타 들어갔고 둘째는 조금씩 울다가 나중에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었다. 아이들을 잠깐 들여보내고 나와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모습이 보였다. 신랑의 의견은, 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같이 결과를 도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이들이 이야기를 할 때 알아들었다는 표시 없이 당신의 원래 의견을 다시 말한다. 그럼 결국 평행선을 그리는 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당신은 아이들의 의견을 알아들었다거나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도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나에 대해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더 대화가 어려운 거 아냐?"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아마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지금까지 나와 신랑이 무수하게 지나온 그것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단순하게 지금 이것만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고정관념'이라기에, 그런 것은 전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둘째가 문을 벌컥 열더니 또 울면서 소리쳤다. "이건 고정관념 아니라고요! 그냥 나는 이 상황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우리 이야기를 안 들어준 건 아빠잖아요! 무슨 고정관념이에요. 그런 거 없어요!" "일단 너는 들어가 있어. 엄마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아이를 들여보내고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에게 17년 동안 꾸준히 부탁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구나."라고 공감해 주는 그 한 마디라고. 당신의 생각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감정이 들고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공감만 해 주면 된다고. 


그러더니 신랑이 문득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자신이 오은영 박사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편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았다고. 아는데 고쳐지지 않는다고. 상황이 다 지나고 나서야 '내가 왜 그랬지.'라고 후회가 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신랑이 또다시 원래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진심으로 갑갑해졌다. 다시 큰 아이를 불러다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를 시키고 나니 그제사 알았다고 했다. 나는 다시 말해 주었다. 일단 이런 상황에서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이 맞다고. 아이들에게 이러이러한 상황인 것을 알았으니 정말로 한 번만 더 보고 그때는 언니가 했는데도 안 했다면 그때는 확실하게 책임을 묻겠다라고 말하면 된다고. 


남편은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지만 늘 이런 부분에서 참 어려웠다.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거나 결론까지 도달하는데 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나하나 이해하도록 내게는 너무나 간단하고 상식으로 여겨지는 부분들조차도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많아서 가끔은 대화를 하고 나면 진이 빠졌다. 순수하게 재미있어서 웃으면 비웃는 거냐고 기분 나빠하는 것이 여러 번이 되자 어느 순간 웃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 혼자면 그냥 참고 가는 것이 많았다. 일단 상황은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청소년이 된 딸들과의 어려운 상황이 잦아지면서 중재자로 역할을 하게 될 때가 많았다. 힘들게 지나고 나면 푸시시 사그라드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어찌 되었건 잘 끝나서 다행이다.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운 느낌은 아마도 늘 이 맘 때면 다가오는 빈혈 때문이겠지. 철분제를 하나 먹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졸리지만 자고 싶지 않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