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울 May 16. 2024

선생님 살려 주세요

"우와 진짜 잘 그렸다. 딸기 너무 잘 그렸는데?"

"그건 선생님이 그려줬지."

"아... 어쩐지. ㅋㅋㅋㅋ"

딸아이가 그려온 마카롱 그림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림을 그릴 때 딸기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빨간색 과일 안에 노란색 씨앗과 하얀색 빛나는 부분에 작고 섬세한 음영이 모두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딸기 컵 케이크를 그리면서 내가 왜 딸기를 그리고 있는지 후회를 엄청 했었다. 중2인 둘째는 토요일마다 미술 학원에 다니고 있다. 주중에는 주지과목 위주로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쉬는데 그림을 취미 삼아서 배우고 있다. 미술학원에서 나오는 작품들이 멋진 것은 물론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의 실력이 좋은 것도 있지만 선생님의 한 끝 터치의 힘이 작용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순간 선생님이 한 번 붓질을 해 주면 작품의 결이 달라지는 것이다.


"선생님 살려 주세요!"

아이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다. 그림을 어느 정도 완성한 아이들이다. 오늘은 수채화 동아리 1학기 마지막 시간. 어느 정도 물감과 물의 농도를 조절하는데 익숙해지고 그림을 그리는데 재미를 붙일까 싶었더니 동아리 활동이 끝이 나 버렸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사실 2시간도 부족한데 주 1회 40분의 동아리 시간은 정말로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지난주에 기본 바탕을 잡고 어느 정도 색칠하다가 오늘 마저 완성하기로 했다. 손이 빠른 아이들은 하나씩 더 하고 조금 꼼꼼하게 하고 싶은 아이들은 이어서 한다. 시작한 지 20분 정도 되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하다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선생님 살려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그림을 가져온다. 


내가 정말로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라면 더 그럴싸하게 쓱쓱 순식간에 완성도를 높여주겠지만 나라고 엄청나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보면서 아이에게 먼저 의사를 묻는다. "일부러 선을 가늘게 뽑은 걸까?" 그러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는 그 의사를 존중해서 필요한 부분에 명암을 넣고 색을 보충하는 정도로만 알려준다. 그렇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에게는 선의 굵기와 색을 달리해 가면서 그림에 좀 더 입체감과 컬러감을 입히는 방법을 보여주면서 더 꽉 채워 준다. 아이들은 보통 색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몇 개만 쓰기 때문에 그림이 단조로워 보이는데 여기에 밝은 색과 진한 색을 곳곳에 포인트로 잡아주면 그림이 확 살아난다. 가끔은 내가 살려 주기 어려운 작품도 물론 존재한다.


"자아.... 미안하지만 종이 새로 줄 테니까 집에서 다시 한번 해 보자. 잘했는데 바탕선을 검은색 물감으로 해서 이렇게 번져 버린 거거든. 선은 나중에 펜으로 그려줘도 되니까 일단 꽃과 잎을 선 없이 색칠만 해 올까? 색칠은 정말 잘했어." 아마 싫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를 가져갔다. 물론 봐 가면서 이야기를 한다.


"ㅇㅇ아 해 보니까 어때? 좀 나아졌어?"

ㅇㅇ이는 처음에 수채화 동아리만 아니면 다 된다고 했는데 수채화 동아리에 어쩔 수 없이 와서 표정이 계속 우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그리는데 꽤 귀여운 작품들이 나온다.

"아니요." 

"왜? 더 별로야?" 

"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가 어찌 안 귀엽겠는가. 

"뭐가 더 별로야? 내가? 네가? 아니면 수채화가?" 

"수채화요." 

아..... 나는 ㅇㅇ이에게 열심히 어필을 했으나 보드게임부나 운동부를 하고 싶었던 활기 넘치는 ㅇㅇ이에게 가만히 앉아서 그림이나 그리는 수채화 동아리는 여전히 별로였나 보다. 


그 ㅇㅇ이가 지난번에는 수채화 책갈피를 만들면서 열심히 편지를 썼다. 종이 치고도 30분이나 남아서 그림을 마저 완성하고 부모님 두 분께 각각 편지를 쓰면서 나에게 고민을 이야기한다. 

"선생님! 아빠한테는 보세요! 이렇게 쓸 말이 길게 술술 잘 나오는데 엄마한테는 참 안 써져요." 

"음, 그럴까?" 

"아마 엄마한테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 

"아빠는?" 

"아빠는 저한테 대해 주세요." 

엄마에게 말이 고민이라던 ㅇㅇ이는 결국 그래도 엄마에게도 편지를 최대한 열심히 써서 멋진 책갈피 개를 완성해서 어버이날 선물로 가져갔다.


2학기 시작할 때까지 수채화 동아리로 모일 일이 없으니 어쩌면 ㅇㅇ이의 "선생님, 살려 주세요."는 이제 다른 의미로 말하는  "선생님, 이제 살았어요!"가 될 수도 있겠다. 담임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동아리 갈 때마다 울면서 간다니 이제 당분간은 정말로 '살았다!' 가 될 것이다. 한쪽에 ㅇㅇ이를 닮아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을 보며 혼자서 미소를 지어본다. 당분간 즐기렴! 선생님은 2학기 때 또 더 열심히 가르쳐 볼게!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편지 속 커다란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