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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라면 못 먹어 미안해

by 여울

오늘은 애정하는 ㅈㅎ 작가님이 서울에 오신다고 했다. 우리는 재빠르게 모였다. 글로 만난 사이지만 그럼에도 일지 그래서 일지 더 각별한 것이 있다. 글로 서로의 삶을 나누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사실 원래의 나라면 이렇게 저녁 모임은 잘 가지 않는다. 안 간다기보다는 큰 행사는 하루에 하나만 잡는다. 그래야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습득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늘의 일정이 꽉 차 있어서 에너지 상으로도 시간 상으로도 안배가 맞지 않는 일정이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는 셋째 야구부 행사가 좀 크게 있었고 정기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아 피아노 연습도 집중해서 해야 했다. 집에 오니 6시가 넘었는데 아이들 저녁을 서둘러 만들어 주니 벌써 7시가 넘어간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은 산적하지만 나는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주차장에서 나는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잠깐 눈을 10분 정도 감고 에너지를 모으고 눈의 피로를 풀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자랐지만 사실 서울의 곳곳을 잘 알지는 못한다. 어릴 때는 고궁도 많이 다녔지만 크고 나서는 지금 사는 동네 위주로 지내니 한강 남쪽과 그 언저리를 제외하면 강북으로 갈 일이 정말 드물다. 은평구에 사는 외가 식구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나서는 더더욱 갈 일이 적어졌다. 그런 나에게 ㅈㅇ 작가님은 서울의 곳곳을 새롭게 다니게 해 주신다. 지난번에는 삼청동 쪽을 산책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을 정말 난생처음으로 가 보았다. 밤이라 잘 안 보였지만 청와대도 처음으로 보았다. 나는 진정한 서울 촌놈이었다.

처음에는 팔각정에 들어가는 줄이 길어서 포기하고 가려다가 유턴하고 어차피 길이 막혀서 기다리다 보니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에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남산에서 보는 것과는 달랐다. 어린 시절 관악산에서 보던 것과도 또 달랐다. 하늘은 맑고 북두칠성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고 경관조명까지 어우러졌는데 공기는 깨끗하고 서울의 도심은 고요한 듯 화려했다. 혼자서라면 절대 찍지 않을 사진들도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며 분위기에 휩쓸려 마구 찍고 있었다. 깔깔깔 웃다가 라면을 먹자고 했다. 앗. 어쩌지.


사실 오늘부터 다이어트 시작이다. 그리고 내가 다이어트 모임 리더다. 첫날부터 밤 9시 반에 라면을 먹기에는 리더로서 면이 서지 않는다. 고민고민하다가 "저는 못 먹어요."라고 말하는데 너무 죄송한 것이다. 이 경치를 보면서 먹는 그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정말 잘 알고 있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되어 버렸으니 할 말이 정말 없다. ㅈㅇ작가님도 안 드신다고 하시자 결국 라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ㅈㅎ작가님 기대하신 것 같았는데 서운하셨을까 봐 계속 마음이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그럼 "라면 대신 아이스크림!"을 드시고 나는 물을 마셨다. 팔각정에 있는 편의점에는 정말 다이어트하는 사람이 먹을 것은 물 밖에 없었다. 사실 거기에 있는 황치즈바도 먹고 싶었고 초코바도 먹고 싶었다. 나도 안다. 이런 때는 그냥 눈 한 번 딱 감고 같이 라면을 먹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인데. ㅈㅎ작가님이 서울에 얼마나 자주 오시겠는가 말이다. 이런 추억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고 산통을 깬 셈이 되어서 계속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번 달에는 유독 약속이 많은데 계속 서운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아. 나의 다이어트에 이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너무 고민이 되는 밤이다. 같이 라면 못 먹어 정말 미안해요.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꼭 같이 맛있게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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