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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14. 2024

피아노 치면 치매 예방에 좋다던데...

다음 주면 정기연주회다. 이제 7일 남겨두고 온 신경이 곡을 완성하는데 가 있다. 이렇게 날마다 열심히 연습을 한 것이 몇 년 아니 몇 십 년 만인지 모르겠다. 아이들 봐주고 밤 9시 넘어서 연습실로 향하기도 하고 퇴근길에 직행해서 연습하고 집으로 서둘러 오기도 하고 이도저도 시간이 없을 때는 학교에서 퇴근 시간 이후 30분이라도 연습을 한다. 레슨 녹음한 것을 반복해서 듣고 전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복기한다. 포핸즈라 악보를 보고 치지만 사실은 거의 외운 지경이다.


피아노를 치면 칠 수록 이건 운동이고 과학이고 노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는 말했다.

"그냥 건반만 정확한 각도로 누르면 되는 거 아니야? 피아노 치는 게 그렇게 힘들다고?"

그러니까 그게 힘들다고.

"아니, 컴퓨터 자판 누르는 것과 뭐가 다른데? 심지어 반동도 있으니까 더 쉬운 거 아냐?"

그래.... 그러니까 그 힘 빼고 조절하는 게 힘들다고....

그러는 너는 그 쉬운 피아노를 못 쳐서 떴다 떴다 비행기만 치다가 피아노를 끝냈다고 하지 않았니....

"그거야 별로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뭐... 아무리 쉽지 않다고 말해 봤자 마음에 와닿지 않는데 그 무슨 설명이 효과적일까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의가 상하겠다 싶다. 그런데 정말로 피아노는 치면 칠 수록 노동이다. 손가락에서 힘을 빼면 손목에 힘이 들어가고 손목에서 힘을 빼면 팔꿈치에 힘이 들어가고 팔꿈치에서 힘을 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전체를 릴랙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근육을 계속 움직여야 하니까 저절로 힘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특정 근육을 움직여서 소리 강약을 조절해야 하고 소리 깊이를 조절해야 하고 레가토와 논레가토, 스타카토와 그 사이사이 쉼표와 쉼표가 아닌 것들... 다운 업과 업 다운, 사이사이 숨어 있는 헤미올라와 폴리포니.... 그 와중에 박자의 리듬은 지키면서 곡의 유기적 연결을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포핸즈니까 옆 사람 소리도 들어야 하고 서로 손이 자연스럽게 위치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해야 하고 혼자서는 죽을 쒀도 그래도 되지만 포핸즈는 이도저도 안 되어 총체적 난국이 되기 십상이다.





너무 아름답고 좋기만 했던 슈베르트 환타지 D.940이 사실은 이렇게 다이내믹하고 다채로운 곡이라는 것을 쳐 보면서 알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안 봐서 모르겠지만)에 나왔다던 1악장만 잘 알고 있었는데 느린 것 같은 2악장은 사실은 포르테와 피아노가 번갈아 나타나는 열정적인 곡이고 미뉴엣인 3악장은 발랄하게 통통 튀어 다니지만 화려한 왈츠처럼 펼쳐지고 악보는 그리 안 어려워 보였던 4악장은 알고 보니 푸가형식이라 무지하게 어려웠다. 20분 가까이 되는 이 곡을 연주회에 올리려니 중간에 조금 잘라내었는데 그래도 17분 정도가 된다. 한 번 맞추고 나면 기력이 달려서 숨을 골라야 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그에 맞춰서 표현하려고 온몸을 사용해야 하니 치매예방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어릴 때 피아노 배우면 똑똑해진다고 하는 광고도 사실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안 쓰는 근육들을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청각과 촉각에 자극을 주고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내가 치매 예방 하려고 피아노 치나? 그냥 좋으니까 치지. 처음에는 곡이 낯설고 이게 되겠나 싶었는데 치면 칠 수록 좋은 걸 보니 나는 사람도 음악도 정이 드는데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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