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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23. 2024

왜 계속 무대에 서고 싶을까

어제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나는 1부 마지막 순서. 하루 종일 무리하지 않으려고 했다. 오전에는 늘 하던 필라테스가 아닌 발레핏을 한 시간 정도 했고 쉬었다. 간단히 집 청소를 하고 씻고 늘 하는 간단한 화장을 했다. 생각해 보니 메이크업 도구를 좀 가지고 있으면 좋겠는데 눈 화장을 한지 하도 오래라 있는 것은 다 굳고 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학원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 손을 조금 풀고 원장샘이랑 같이 호흡을 두 번 정도 맞춰 보았다. 2악장의 트릴 부분은 박자가 대체로 맞았지만 가끔 아슬아슬했다. 3악장은 속도를 200으로 올리니 왼손이 간혹 버거워했다. 우리가 치는 곡은 슈베르트의 환타지 D.940 포핸즈이다. 4개의 악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딘가에서 끊어 내기가 굉장히 애매하다. 그런데 전 악장을 다 연주하면 20분가량 되는 긴 곡이라서 독주회도 아닌데 무대에 올리기가 곤란하다. 나 말고도 14명의 연주자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 당 10분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시간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3악장에서 좀 빼 내고 1악장도 상당 부분 걷어냈더니 아슬아슬하게 12분 정도로 맞출 수 있었다. 3악장의 속도를 올린 것도 그래서이다.


모차르트 홀에는 대형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었다. 미니 그랜드도 있었는데 제일 큰 사이즈의 소리를 들어보니 그 좋은 소리를 놓칠 수 없어서 십만 원을 원장님이 추가로 더 내시고 업그레이드하셨다고 한다. 20년 만에 쳐 보는 스타인웨이다! 명인은 악기 탓을 안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초보니까 악기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진짜 피아노가 좋으면 100은 더 먹고 들어간다. 훨씬 잘 치게 들리는 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드디어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좀 떨리기는 하는데 손가락 끝에 착착 감기는 소리와 터치감이 너무 좋았다. 원장샘이랑도 호흡이 착착 잘 맞는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


곧이어 연주회가 시작된다. 아이들이 도착하고 막둥이를 자리에 앉히며 신신당부를 했다. 조용히, 움직이지 말 것. 신랑이 셋째 야구대회 때문에 지방에 가 있고 오늘따라 친정 식구들도 다 일정이 있어서 아이들과 나중에 친구만 따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실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막둥이가 음료수를 찾으며 돌아다닌다고. 왓???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연주자가 끝나고 막간에 공연장으로 가서 막둥이를 끌고 나왔다. 그때 내 표정을 보신 몇몇 분이 "우리 엄마의 표정이 확 보였어요!"라고... 물어보니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셔서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고 한다. 밖에서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하고 잠시 있었다. 곧이어 내 순서이기 때문에 이 아이와 계속 여기에 있을 수도 없었다. 호흡 조절하기도 바쁜 와중에 이게 뭐람. 제발 끝까지 공연장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대기실로 향한다.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너네 막내 좌석에서 좌석으로 돌아다닌다." 으아.... 어제 다시 들어간 거니.... 흑흑. 하지만 진짜 내 순서가 코앞이라 이젠 어쩔 수 없다.


정식 무대에 오랜만에 서니 갑자기 막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계신 원장샘도 긴장하신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갑자기 더 떨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곡에 몰입하는 것이다. 저 오른쪽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잘 보이지도 않지만 의식이 안 될 수가 없다. 뜨거운 조명 아래 건반은 눌리고 음악은 흐르기 시작한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 악보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래서 아무리 악보를 보고 해야 하는 포핸즈라도 외우다시피 해야 하나 보다. 그래도 곡은 진행이 되고 흘러가고 중간중간 티가 나지 않는 실수도 있고 티가 나는 실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마쳤다. 왜 치면서 중간에 점점 더 떨리는지는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끝까지 잘 갔다.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니 끝난 건지 어쩐 건지 실감은 잘 나지 않았고 일단 우리 막둥이부터 단속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2부가 시작되어 이 아이를 데리고 제일 뒷줄로 가서 내 옆에 앉히고 밀착 케어를 했다. 2부는 별들의 전쟁인지 별들의 향연인지 아무튼 정말로 화려했다. 슈베르트 소나타부터 시작해서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차이코프스키 바바야가의 오두막, 리스트의 사랑의 꿈, 어렵기로 유명한 쇼팽의 프렐류드와 에뛰드, 쇼팽 발라드 1번, 카푸스틴의 이름도 모를 화려한 곡, 그리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까지. 1부 마지막이라서 너어무 다행이다. 마음 편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너무 좋았다. 내 실수에는 깐깐하지만 남의 실수에는 관대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공연이 끝난 후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조금 늦게 뒤풀이 파티에 갔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해석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고 서로의 음악을 이야기했다. 성인전문음악학원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30대 전후를 오간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계시긴 한데 일단 내가 제일 많아 보이지만 철판깔고 그냥 같이 앉아서 이야기했다. 여기선 내가 언니가 된다. 피아노가 뭐가 그렇게 좋길래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꺼이 몇 시간씩 투자해서 연습을 한단 말인가. 이건 정말 음악이 주는 그 아름다움과 기쁨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무대에 서는 것은 말도 못 하게 떨리는 일이다. 그 긴장감이 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선다. 아마추어라도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연습을 하고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서 완성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선다. 실수를 해도 멈추지 않고 진행을 한다. 어떻게는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이 무대니까. 생각해 보면 합창단의 한 사람으로 섰을 때도, 지휘자로 섰을 때도, 독주자로 섰을 때도 늘 긴장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긴장됨을 뚫고 무대를 마치고 나면 밀려오는 독특한 감동이 있다. 6개월의 준비가 겨우 10분 정도에 끝나는 순간이라면 허무할 법도 하지만 그것과 비견할 수 없는 쾌감이다.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하나의 산을 넘었다는 그런 기쁨이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음 산을 기꺼이 오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쉼이 있어야 한다. 어제는 몰랐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무겁고 움직이기 힘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장을 했었나 보다. 더 좋은 것은 이제 잠깐 숨을 돌리면서 내 일상을 돌아보면서 조금 더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목표에 올인하는 것은 좋지만 막판 스퍼트를 올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다른 일상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한 가지 일에 올인해 본 사람은 다른 일에도 또 열정을 쏟아볼 수 있다. 작은 성취감을 안고 다음을 향할 준비를 한다. 우리의 일상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작지만 강력한 동력. 그것이 우리가 무대에 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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