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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an 07. 2025

책에 웃고 책에 울다

월요일은 다른 날보다 템포가 더 빠르고 좀 더 꽉 차 있다. 모든 사람의 월요일이 그러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한 가지가 더해져서 그렇다. 월요일 밤 9시는 온라인 강의가 있는 시간이다. '영어책 읽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지 꼭 1년이 되었다. 원서강독 시간인데 아직도 갈 길이 많은 나를 믿고 와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셔서 어찌어찌 수업이 지속되고 있다. 보통은 이 원서강독 책을 읽고 나면 그 여운에 빠져 있는다. 그리고 마무리 정리를 해서 글을 올린다.


오늘 수업 한 부분은 Wonder의 주인공 어기의 누나 비아의 남자친구, 저스틴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비아의 시점에서 저스틴은 그저 멋지게 보였는데, 막상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저스틴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힘듦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는 고민을 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구마구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또 뒤에 나오는 미랜더의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의 영문판 Human Acts를 펼쳤다. 지난주 한강작가작품 탐독모임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그녀의 소설의 영문판이 너무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선 지금 읽고 있는 소년이 온다의 영문판부터 구입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너무 궁금한데 일단 Human Acts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첫 장을 펼치는데 한국판과는 다른 도입부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고 잘 알려져 있지만 외국인에게는 낯선 5.18의 이야기와 한국의 현대사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 설명이 몹시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핵심을 잡고 있어서, 이 부분을 외국인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졌다. 박정희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부모님 세대를 둔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담담한 문체로 서술해 나간 도입부가 어찌나 흡입력이 있던지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드디어 시작된다. 역자는 어떻게 풀어내었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넘긴 첫 장은 한국어로 쓰인 원문의 느낌을 정말로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부서질 듯, 허공을 맴도는 듯한 그 아픈 목소리가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써졌는데도 그대로 타고 흘렀다. 읽으면서 느껴지는 그 아픔, 그 위태로움, 그 아슬아슬함이 숨을 죽이고 글을 따라가게 만들었다. 이 책은 꼭 영문으로도 읽어 보시면 좋겠다. 다른 작품도 영어로 읽어 본 후 다른 원서 읽기 프로그램에서 같이 느리게 읽으며 느껴봐야 한다는 그 강렬한 필요가 내게 왔다. 그냥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나 바람이 아니라 '꼭'이어야 한다는 당위성 같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왜 한강 작가가 삶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이토록 아름다운가라고 말 했는지가 이해가 되었다. 아픔을 담아내면서 동시에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위로가 아니다. 이 아픔과 고통을 몰랐던 우리가 이제는 글로라도 간접적으로라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래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함께 돌이켜 보는 그런 위로인 것이다. 부끄러웠다. 5.18을 아이들에게 여러 번 가르치면서도 단순히 아프다는 단어 하나로는 감내할 수 없을 그 지독한 고통을 나는 역사 밖에서 말로만 짚어주었던 것이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운 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계속 소년이 온다를 읽고 싶은데 멈추어야 했다. 오늘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원서 읽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내가 시작한 모임이니 먼저 읽고 방법을 보여드릴 필요가 있다. 방학 전부터 기대를 하고 있던 책인데 소년이 온다의 눈물에 젖어 있다가 오만과 편견을 펼치려니 마음이 답답했다. 그래도 의무감에 책을 펼치고 읽는다. 18세기 19세기의 영어, 거기에 영국식 영어이니 당연히 어렵다. 거기에 감정도 아직 추스르지 못한 상태로 읽으려니 더더욱 몰입이 잘 안 된다. 그래도 일단은 읽었다. 모르는 단어들, 아는데 문맥상 내가 아는 뜻이 아닌 것 같은 단어들을 정리하면서 더디게 읽어 나갔다. air of decided fashion이 도대체 무슨말이야....읽다 보니 또 웃기다. 한글 번역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던 베넷 부인의 말투나 베넷 씨의 말이 확 살아나고 그들이 주고받는 설전과 설왕설래가 재치 있게 펼쳐진다. 왜 제인 오스틴이 이렇게 사랑받는 작가인지 영문판을 읽으면서 조금 더 알게 된다.


그러니 지금 내 마음은 복잡하다. 한쪽에서는 원더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아픔과 성장과 웃음이 있고, 한쪽에서는 소년이 온다의 가슴 저린 눈물과 에임이 있고 이쪽에서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의 유쾌함과 베넷 씨 부부가 보여주는 만담 같은 장면들이 범벅이 되어 있다. 아픈 눈물이 아직도 눈가에 맺혀 있는데 저쪽 세상은 부조리하면서도 유쾌한 재치가 있다. 나 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 진정. 책에 울고 책에 웃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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