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은 그냥 건강해지기만 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과한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모든 굵직굵직한 일들을 다 겨울방학으로 미루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일들의 반이 아니라 반의 반만 해도 다행이겠다.
이십 대의 어느 가을 나는 몹시 아팠다. 날은 화창하고 너무 좋은데 그날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나는 서울대공원으로 갔다. 남친과 데이트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생각에는 그랬다. 아프다고 누워있던지 돌아다니던지 간에 낫는 기간은 똑같으니 그냥 돌아다니고 말겠다! 돌이켜 보건대 어쨌거나 젊으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진짜로 꼼짝 못 하고 죽어가던 독감 걸린 초엽에는 그 좋아하는 피아노도 못 칠 정도로 앓아가며 누워 있었다. 그 와중에도 힘이 나면 조금씩 책을 빼고 집을 치웠다. 그러다 다시 쓰러져 누워 있기를 반복했다. 낫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 것 같은 기분의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안 있고 일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약을 먹었어도 귀는 여전히 아프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먹먹한 이 압력은 머리도 멍하게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전 병원 진료를 마친 후 가만히 생각했다. 이대로 집에 가면 나는 누워서 시간을 흘려보내겠지? 피아노 연습하러 가야겠다. 가서 피아노를 정성껏 2시간을 쳤다. 그렇게 오래 치려고 한 건 아니었고 속도를 아주아주 느리게 해서 연습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2시간이 그냥 지나가 있었다. 어쩐지 어지럽더라.
집으로 겨우겨우 와서 일단 계란을 부쳐서 먹었다. 힘이 너무 없어서 뭐라도 먹어야지 싶었다. 먹고 바로 누울까 말까 망설이다가 부엌 정리를 하기로 했다. 내일 힘이 좀 나면 하려고 했는데 이제 방학은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이 속도로는 새 학기가 되어도 어질러진 집과 씨름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남은 책들을 하나하나 빼내고 (이게 책을 육백 권 - 추가로 더 팔았다-을 빼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금씩 다른 책장으로 옮겼다. 전자레인지를 놓는 대 옆에 있던 곳을 싹 비워냈다. 으아 먼지. 양쪽 공간 모두에서 먼지가 한가득 나왔다. 걸레받이 위에 있던 먼지도 닦아내고 묵은 먼지들도 모두 닦아냈다. 안다. 며칠 지나면 저 밑으로 다시 먼지들이 뭉쳐서 자리 잡을 것을. 그래도 일단 일단 닦아내니 마음이 한결 좋았다. 오래된 약봉투도 모두 정리하고 안 먹는 차와 간식들도 죄다 버렸다. 그리고 나니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닭볶음탕을 하려고 닭을 꺼내놨는데 안 되겠다. 도저히 못하겠다. 막둥이가 일주일 전부터 짜장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오늘을 그날로 해야겠다. 식구들이 짜장면을 먹는 동안 잠깐 쉬었다가 둘째랑 마저 정리를 했다. 다 버리고 싶은데 물어봐야 한다. 세븐틴 굿즈들은 버리면 안 되고 쿠로미 키링도 귀여우니까 버리면 안 된단다. 굴러다니는 종이 하나도 소중한 추억이 있어서 버리면 안 된다를 외치는 둘째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어쨌거나 공간 정리를 마친 집에 이제사 집에 온 첫째가 외친다. "어! 뭐야! 다른 집 같아! 왜 이렇게 깨끗해! 비어 있으니까 이상해!" 야아....그게 정상이야....(그리고 사실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았다.)
먼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집을 갖고 싶은데, 살림을 하면서 깨달았다. 물건을 이고 지고 사는 동안에는 먼지 없는 집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쓱쓱 닦으려면 선반이고 책장이고 물건이 없어야 가능하다. 한두 개 정도야 가뿐하게 들고 닦을 수 있겠지만 서너 가지가 넘어가면 조금 닦다가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시간이 있을 때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정리를 한다. 제발. 올 겨울에 다른 것은 다 못해도 괜찮다. 다만 자잘한 짐들을 줄여서 청소도 가뿐하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먼지를 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보자고. 또 떨리는 손으로 다짐을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