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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에서 섣부르게 구매한 자의 후속 고민

가스레인지를 영어로 하면

by 여울

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중개사님께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이사 가시는 집에서 가스레인지가 기존 세입자 분이 설치하신 거래요. 2 구인데 원하신다면 2만 원에 구입 가능하시다고 합니다."

아...... 아...????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우선 나는 2구가 아닌 3구를 선호한다. 2구 가스레인지가 설치가 되어 있다면 상황을 봐서 내가 철거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굳이 2만 원을 내면서까지 따로 구입하고 싶지는 않다. 또 내게는 인덕션이 있었다. 무려 휘슬러 브랜드로!!!!


이 인덕션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몇 년 전 아는 블로그 이웃님께, 상당한 가격을 드리고 구매했다. 장까지 따로 맞추신 거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구입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좀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새것을 샀어도 무난한 브랜드로 몇 십만 원이면 되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나중에사 든 것이다. 물론 휘슬러 브랜드가 좋은 것도 알고 새 제품은 세 배 가까이 높은 것도 안다. 다만 내 상황에서는 고가라는 의미다. 어쨌거나 그 좋은 인덕션을 사서 행복했는데 쓸 수가 없었다.


이전에 살던 집의 주인분께서 기존에 있는 가스레인지 오븐 철거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그 가스레인지 오븐의 나이는 대략 이십 년. 세월의 흔적을 차고 넘치게 담고 있었기에 아무리 해도 상단과 하단은 물론이고 곳곳에 쌓이고 축척된 기름때를 없앨 수가 없었다. 겉면은 부식이 되어 코팅은 녹슬고 우둘투둘하게 벗겨진, 정말로 볼 때마다 우울해지는 그런 가스레인지였다. 오븐 역시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특별 세정제까지 사서 열심히 닦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들어오는 세입자가 원할 수도 있으니 그냥 두라고 했다. 아무도 원치 않을 것 같았지만 내 집이 아니니 할 수 없다. (실제로 나중에 이 오래된 가스레인지는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별 수 없이 인덕션은 베란다에 놓고 잠시 썼지만 결국 방치되어 버렸다. 맘 편하게 조리를 하기에 베란다를 오가는 것은 많이 불편했다. 앞베란다에 덩그러니 놓인 인덕션을 볼 때마다 신랑은 나에게 한 소리를 했다. 당해연도 내 성과급을 모조리 털었던 인덕션은 명품백도 하나 없는 내가 산, 일부 가전제품을 제외하면, 유일한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저희는 인덕션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사를 오던 날, 한쪽에 놓인 폐가구수거장에는 2만 원 가격이 붙었던 그 가스레인지도 같이 놓여 있었다. 가져가시거나 중고로 판매하실 줄 알았는데. 호기심에 다가가 보니, 구매하기엔 좀 아깝다 싶었다. 만약 철거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애매했을 것이다. 나는 가스레인지를 여전히 선호하기 때문이다. 인덕션도 좋지만 가끔은 가스레인지가 편리한 부분이 있기에 가스레인지도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당근을 뒤졌다. 맘에 드는 것은 조건이 맞지 않았고 대부분은 빌트인이라서 거치대를 따로 구입해야 했다. 거치대 가격을 포함하면 다시 가격이 상승했다. 그러다 가스레인지가 위에 놓여있는 빌트인 오븐을 2만 8천 원에 판매한다는 글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당근에 올라와 있던 원본 사진

"삼성 빌트인 오븐 판매합니다. 상단 가스레인지 부분에 사용감이 좀 있지만, 오븐 기능은 정상 작동합니다."

그리고 사진에는 가스레인지와 오븐이 모두 나와 있었다. 하여 당연히 가스레인지도 같이 판매하는 줄 알았다. 구매 예약을 하고 문자도 받았다. 그런데 가스레인지는 밑에 내려놓고 가져가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스레인지는 사용감이 많으니 버리는 용도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같이 가져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가스레인지가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추가로 입금을 하라는 것이다. 오른쪽 큰 화구가 안 되어 저렴하게 내놓은 것이라고. 따로 판매하는 용도면 왜 같이 올려서 내놓았단 말인가... 내가 글 이해를 못 한 것인가 싶어 사진과 설명을 여러 번 보았지만 누가 보아도 가스레인지에 오븐을 같이 판매하는 글로만 보였다. 나는 그냥 같이 구입하겠다고 했다. 이미 가져왔는데 가스레인지를 다시 갖다 놓으러 먼 길을 가기엔 이사 후유증이 너무 컸다. 자세히 물어보니 점화되는 소리는 나는데 불이 안 들어온다고 했다. "그럼 닦아서 쓰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이미 가스레인지 청소를 여러 번 해 보았기에 막힌 부분만 잘 닦아 주면 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오븐이 일단 도착했다. 원래 내가 같이 가서 운반을 하려고 했는데 그 전날 이사 후유증인지 어깨 근육이 뭉치면서 등 쪽에 담이 제대로 왔다. 팔도 못 들어 올리고 아얏소리만 계속 나서 결국 용달 기사께 한 분을 더 모셔야겠다고 했다. 용달에 자리가 없어서 나는 집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오븐을 보니까 황당했다. 빌트인 오븐인 것은 알았는데 상판이 잘린 상태로 오븐 위에 쿡탑 형태의 가스레인지가 올라와 있는 채로 온 것이다. 차라리 쿡탑마저 빌트인 되었다면 그대로 싱크대 사이에 끼우면 되는데, 이제 곤란해졌다. 일단 베란다로 옮겨 달라고 하자 두 분이 오븐은 분리해서 싱크대 하단 장에 끼우면 된다고 했다. 싱크대 문을 쓱쓱 분리하시더니 오븐을 쓰윽 넣으신다. 오븐은 (빌트인이니 당연하겠지만) 맞춤처럼 들어갔다. 이 문제는 이렇게 일단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오븐이 들어있던 수납장은.... 대형 폐기물 처리 비용을 내고 버려야 했다.


이제 가스레인지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당근에서 거치대를 찾아보았는데 대부분 인덕션 용이라서 사이즈가 안 맞는다. 쿠팡에서 거치대를 착한 가격에 맞춤 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견적을 내고 문자도 받았다. 결제에 컨펌까지 끝냈다. (돌이킬 수 없다.) 이제 가스레인지 청소를 해 보고 어떤 상태인지 보자.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분해도 잘하고 조립도 잘해서 겁이 없었다. 그래서 공구를 꺼내 나사를 스윽스윽 돌리는데 아앗... 나사 두 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얼마나 꽉 녹이 슬어 박혔는지 소용이 없었다. 거기에 나사 머리 역시 부식되어서 아무리 돌려도 돌아가지 않았다. 윤활제도 콜라도 소용이 없었다. 근처 철물점 아저씨께 전화를 드렸다. 주말까지 지방에 계신다고....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다. 저렇게 나사를 풀어헤친 상태로 며칠을 두자니 마음이 너무 심란하다. 수리가 되는지 안되는지 이 문제의 해결을 봐야 마음을 내려놓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SK 매직 홈페이지로 들어가 본다. 출장비가 6만 원. 다만 수리비가 6만 원이 넘으면 출장비는 안 받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무엇이 되었든 6만 원은 기본으로 내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찾아보니 이 모델은 점화 불량과 고장이 잦은 모델이라고 한다. 그럼 차라리 다른 중고를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중고로 올라온 새 제품을 십만 원에 아예 다시 구입하는 게 나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렇게 밤늦도록 검색과 고민의 굴레에 빠졌다. 그 와중에 가스레인지로 다가가 짬짬이 드라이버와 펜치를 돌려 보지만 여전히 택도 없다. 빠진 나사들 틈으로 내부가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뭔가 짙은 갈색의 끈적끈적한 것들이 원치 않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빨리 다 닦아서 없애고 싶다. 되든 안 되든 저 찐득한 존재들을 사라지게 하고 싶다.


이제 당근을 또 검색한다. 녹슨 나사를 제거해 주시는 고수님들이 계실 텐데. 사람들이 2만 원 정도씩 사례비를 드리는 것 같다. 그래서 해결이 되면 다행이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되면 결국 다시 AS 출장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과 고생은 그대로 하고...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나은 거 아닌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차피 왼쪽 두 개는 불이 들어온다는데 그냥 거치대 놓고 쓰다가 이사 갈 때 바꾸는 게 나을까. 바로 옆에는 매우 잘 되는 인덕션이 딱 있으니 말이다.


이 고민을 외국인 친구와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gas range라고 말하고 아이코 싶어 빠르게 정정했다. 우리말로 가스레인지라고 하는 이 gas range는 영어로 완전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한국에서 흔하게 말하는 가스레인지는 영어로는 gas stove 혹은 gas cooktop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하다. 상판에 가열 기능이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스가 아닌 전기로 가열이 되는 인덕션은 어떻게 말할까. 인덕션은 induction cooktop이라고 하거나 전기로 사용되니 electric stove라고 하기도 한다. 오븐은 조금 더 쉬운 개념이다. 사방이 꽉 막힌 조리도구를 오븐이라고 하니 인덕션이나 가스레인지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그렇다면 영어 단어 gas range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좀 더 복합적인 개념이다. 상판 위에 요리하는 쿡탑과 아래에 사방으로 열이 전달되는 오븐이 결합된 형태가 바로 range이다. range는 여러 뜻이 있는데 일단 명사로는 열이나 줄, 그러니 같은 종류의 조합 등을 뜻한다. gas range는 상판에 가스로 조리되는 도구가 결합된 것이고. electric range도 물론 존재한다. 이 레인지 range, 스토브 stove, 쿡탑 cooktop과 오븐 oven의 개념이 헷갈리는 것은 영어권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래서 이렇게 아예 정리를 해 놓은 글들도 종종 나온다. (주로 주방 가전을 다루는 회사들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상판 조리기구와 오븐이 결합되어 있는 조리기기는 레인지 혹은 스토브, 별도로 분리되는 것은 스토브탑 혹은 쿡탑이고 별도로 사방이 막힌 조리 도구는 오븐인 것이다.


https://www.kitchenaid.com/pinch-of-help/major-appliances/range-vs-stove-vs-oven.html


참고로 우리가 전자레인지라고 부르는 기기는 microwave oven이다. 극히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인 마이크로파를 사용해서 음식 속 물분자를 빠르게 회전시켜 마찰로 열을 발생시켜 음식을 데우는 원리이다. ('초고주파'라는 용어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셨던 중학교 과학 선생님께 칭송을.) 무심결에 전자레인지를 직역해서 electric range라고 한다면 우리가 인덕션이라고 말하는 조리 기기를 지칭하게 되는 셈이다. 그나저나 gas cooktop을 갖고 싶은 내 욕망 때문에 며칠 동안 마음에 번뇌가 끊이지 않는다. 이토록 사소한 문제로 인한 고민이라니.....


https://www.wsj.com/tech/personal-tech/why-new-induction-cooktops-are-safer-and-faster-than-gas-or-electric-11619104405?reflink=desktopwebshare_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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