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에 냉동실 정리하고 그만 몸살이 나는 바람에 (정확하게는 냉동실 정리 여파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나를 너무 바쁘게 몰아친 여파인지, 날씨의 여파인지 어쩐 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멈추었던 냉장고 정리를 날마다 조금씩 계속하고 있다.
어제는 잔뜩 사 두었던 로메인을 모두 깨끗이 씻어서 먹기 좋게 통에 다 담아두었다. 양상추 같은 다른 샐러드 채소는 씻어서 두면 갈변하는데 로메인은 씻어서 두면 오히려 싱싱하게 오래가서 좋다.
오늘은 고모가 지난겨울에 주신 저 김치를 좀 정리하리라 싶었다. 고모가 전화로 김치 가져가라고 하셨을 때 나는 울 엄마가 주시듯 통에 담긴 김치라고 생각했다. 막상 가니 거대한 김장 비닐 두 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난감했는데 주시는 걸 거절하기도 어려워 일단 들고 왔다. 한 봉지는 겨우내 먹었는데 아직도 한 봉지가 그대로 있었다. 볼 때마다 봉지에서 한 포기씩 꺼내 먹는 부담감이 싫었는데 또 막상 통에 하나하나 정리할 엄두도 안 났다.
저 김치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는데 정말 며칠이 걸렸다. 통을 꺼내고 준비를 한 후 해당 칸의 선반도 꺼내서 물로 깨끗이 씻었다. 김치 봉지에서 살짝 나온 국물이 얼룩진 선반을 깨끗이 씻으면서 내 마음도 같이 씻기는 것 같았다. 냉장실 안도 깨끗이 닦아 내고 김치를 나누어 담았더니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완전 묵은지이기 때문에 당분간 감자탕이나 김치 부침개 같은 음식을 좀 열심히 해 먹어야겠다.
그리고 쿠키를 만들기로 했다. 요새 냉동실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각종 가루들을 꺼내서 짬짬이 쿠키를 만들고 있었다. 어제는 분유가루로 계란 쿠키를 만들었고 오늘은 다른 가루이다. 제일 쉬운 레시피로 하기 때문에 책을 굳이 펼 필요도 없다.
원래는 버터를 실온에 꺼내놓고 휘핑하다가 설탕을 넣어 가며 하얗게 일으키고 그 사이로 역시 실온에 놓아둔 계란을 한두 개 정도 조금씩 넣어가며 저어주고 다음에 체에 친 밀가루를 정확하게 계량해서 살살 반죽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만. 그럴 정신은 없기 때문에 계란을 먼저 저어주다가 설탕을 넣고 마구 저어주고 레인지에 뜨겁지 않게 녹인 버터를 슬슬 섞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곡물 가루 통을 하나 꺼냈다. 이게 선식가루인지, 미숫가루인지, 아니면 볶은 서리태 가루인지 정말 모르겠다. 이런 가루가 최소한 4통은 있어서 아직도 곡물쿠키는 당분간 나올 예정이다.
베이킹을 좋아해서 정말 오랫동안 했었다. 그만큼 각종 재료도 많이 쟁여두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래놀라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이 취미가 되어 그래놀라 재료도 잔뜩 있다. 그냥 곡물가루만 넣으면 심심하니까 해바라기씨, 슬라이스 아몬드, 오트밀도 좀 넣고, 전에 마카롱 필링 크림용으로 사 두었던 크림 가루도 좀 넣었다. 정말 내 맘대로 쿠키다.
그리고 늘 심심한 막둥이와 신나는 쿠키 놀이를 했다. 막둥이가 고래모양 미역국 모양 김치찌개 모양 등등을 만드는 동안 나는 대강대강 만들었다. 만드는 사이 셋째가 와서 밥을 차려 주고 또 만드는 사이 둘째가 와서 다시 밥을 차려주었다. 아이들이 커서 자기 스케줄이 생기면서 하루에 저녁만 5번 차릴 때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쿠키를 만들고 냉동실에서 발견한 찌그러진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주고 나니 밤 10시가 되었다. 6시 반부터 부엌에서 계속 있었는데 밤 10시라니 알차게 보낸 것 같으면서도 약간은 허전한 마음도 든다.
막둥이가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했는데 사실은 먹고 싶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뭔가를 입에 넣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어떤 맛인가 알아야 다음에 재료 비율을 바꿀 테니 한 번 먹어보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맛이 좋다. 다음에는 계란을 2개만 넣고 버터와 식용유 비율을 늘리고 마카롱 크림가루도 조금 더 많이 넣어서 바삭한 쿠키를 만들어 봐야겠다. 쿠키를 만들면 설거지 거리가 잔뜩 나오는데 도저히 그 그릇들까지 씻을 힘이 없어서 글을 쓰며 잠시 쉬기로 했다.
어제 읽은 마흔 살의 정리법에는 정리도 힘이 있을 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공감이 된다. 냉장고를 많이 치운 것도 아니고 조금 치웠고, 냉장고 파먹기를 엄청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가루 한 통 비웠을 뿐인데 이렇게 힘들 줄이야. 냉파도 젊을 때, 힘이 있을 때나 할 수 있겠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어깨야 아이고 졸려라....(내 나이 마흔 하고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