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언니가 사라진 세계

인간 사회가 아닌 다른 세계의 여왕은 정말 여왕일까

by 여울

아니, 이 무슨 제목부터가 이토록 자극적이고 섬찟하단 말인가. 그러나 상당수 로판(로맨스판타지)의 제목들이 그러하다. 몇 년 전에 읽고 나유혜 작가님의 세계관에 놀라고 충격받아서 이런 책은 꼭 번역이 되어서 영화화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일단 웹툰화는 되었다. 웹툰은 잘 안 보지만 워낙 좋아하던 작품이라서 슬쩍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설을 정주행 하다가 그만 밤을 꼴딱 새 버렸다. 큰일이다. 내일 출근인데 아무리 해도 잠이 안 오고 장면들의 생생한 묘사만 떠올라서 정신만 더 맑아지고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 머리만 더 아파진다.


3시간을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이럴 때는 아예 잠을 자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시도해 보라는 말이 떠올라서 그냥 글을 쓰자 하고 컴퓨터를 켰다.


일단 기본적인 설정은 간단하다. 세외라 불리는 마수의 세력으로부터 특별한 힘을 가진 황가가 나라를 보호하고 그 황가를 수호하는 세 개의 공작가가 있다. 그리고 특별한 힘을 가진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잘 자라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흔하지만 초반에는 핫 했던 세 가지 설정이 있으니, 회귀, 빙의, 차원이동이다. 이 작품도 세 가지 중 하나로 회귀물인데 자칫하면 흔하게 흘러갈 수 있는 회귀물의 클리셰를 잘 피해 갔다. 보통 회귀물의 특징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을 이용해서 재화를 축적하고 인맥을 구축하며 미래에 일어날 나쁜 결과들을 피하고자 한다. (나라도 그러겠다. 카카오와 삼성 주식을 잘 사두고 집도 미리 사서 고점에 파는 거다...ㅡ.ㅡ;;;)


시에나는 믿었던 언니 로레이나(친언니는 아니고 같이 후원받아 입양된 또 다른 여자 아이)가 사실은 자신을 배신한 사실을 알고 죽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어린 시절로 돌아온 것을 알고, 입양되었던 나흐트 공작가와 엮이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지만 역시 같은 수순을 밟게 된다. 다만 어찌 된 셈인지 이전과 다르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지만 크나큰 상처의 기억은 지울 수 없다.


여기까지는 흔한 비슷한 도입 부분. 비슷한 설정의 도입 부분을 매력적으로 풀어가는 작가님의 필력도 대단하지만 끝까지 독자와 밀당을 하는 세부적인 요소들도 놀랍고, 무엇보다도 가장 좋았던 것은 우리 옛날이야기의 재해석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주의)


나는 예전부터 옛이야기를 재해석하는 작품들을 좋아했다. 우리나라 고전만 그런 줄 알았는데 서양의 다양한 민담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을 보고 기존의 것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 자체를 좋아하고 창조적인 해석과 새롭게 보는 안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시진 작가님의 '마니'는 처용설화를 현대적으로 녹여낸 작품이었다. 유시진 작가님의 다소 차갑고 냉소적이지만 또 쿨한 유머가 담긴 시선도 매력적이지만 우리 설화가 주는 신비한 매력을 이렇게도 풀어내고 해석할 수 있구나라는 새로운 관점이 매우 신선했다.


그런 부분에서 나유혜 작가님이 '손톱 먹은 쥐' 이야기를 서양풍의 로맨스 판타지에 이렇게나 절묘하게 녹여낼 수 있다는 점은 정말로 놀라웠다. 분명 수천만명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읽었을 텐데 사람의 일부를 먹은 쥐가 그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이야기를 마수왕의 심장과 사체를 먹고 그 마수왕처럼 인세를 잡을 계획을 세심하게 짜 내려간다는 설정은 읽고 나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읽고 나서도 별 것이 맞다. (나만 그런가.ㅠㅠ)


그리고 그 마수의 왕이 여주의 언니 행세를 했던 로레이나에게 제안하는 여왕의 자리도 사실은 영예로운 자리가 아닌 것이다. 많은 소설과 만화 등 다수의 판타지 작품에서 '여왕'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면 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높은 존재로서의 여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미나 벌의 군집을 보면 여왕은 끊임없이 알을 낳아 그 사회를 유지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아무리 곤충이라지만 알을 낳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 죽을 때까지 보살핌을 받으면서 알을 낳는 존재가 과연 진정한 여왕인 것일지.


그래서 판타지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런 사회의 여왕은 비슷한 개념이다. 끊임없이 알을 낳거나 개체를 생산해 내는 자궁의 역할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단지 '여왕'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에 취해 버린 존재들은 결국은 비참한 자신의 끝을 보면서 몹시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너와 내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자'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가. 그래서 살아있는 아이들을 먹는 '생식'까지 저지른 로레이나는 이지를 잃고 죽을 것 같지만 죽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갉아 계속해서 쥐들을 생산해 내는 자신에게 환멸과 비참함을 느끼며 그저 끝나기만을 바라게 된다.


어찌 되었건 결과는 자신의 선택. 똑같이 사기에 감염되고 똑같이 매혹하는 말을 들었어도 하나는 돌아서서 바른 길을 걷고자 하고 하나는 오히려 나락의 길에 떨어진다. 돌이킬 기회는 여러 번 있지만 놓치기 싫고 놓지 못하겠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으니까. 늘 생각하는 어려운 부분이다. 내 눈앞에 펼쳐진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아닌 정말 그러한 것을 바르게 구분하고 따라갈 수 있는 곧은 용기를 낼 수 있는지.


(2시간이라도 자고 싶은데 역시 잠이 안 온다.... 난생처음으로 밤을 새나 보다....ㅠㅠ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The 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