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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악보를 정리하다

by 여울

재작년에 피아노 선생님이 악보를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버리셨다고 말씀하셔서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 아까운 악보들을.... 나 주시지!!!!!


아마추어지만 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중간중간 쉬는 텀이 있었을지언정 피아노가 없는 삶은 꿈을 꾸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악보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피아노 악보는 비싸다. 국내 출판사 악보도 비싸지만 해외 출판사의 고급 악보들은 몇 만 원은 그냥 우습게 넘어간다. 고작 6페이지짜리가 2만 원 3만 원은 예사로 하기도 하고.


대학생 때는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서는 엄마표 피아노를 한 적도 있어서 각종 피아노 기초 악보와 교육 서적도 한가득이었다. 지난번에 한 번 알프레드나 피아노 어드벤처 등등과 같은 기초 서적을 정리했고 오늘은 자잘한 복사 악보들과 예전에도 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치지 않을 것 같은 현대 작곡가의 악보들도 함께 걷어냈다. 피아노는 내게 각별한 의미라서 악보를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그전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던 벨라 바르톡의 악보들을 넘겨보면서 아... 정말로 안 칠까? 이거 어쩐지 멋있어 보이는데... 하고 뺄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다가 친한 이웃님께 톡을 보냈다. 혹시 필요하세요? 여쭤 봤더니 없는 거라고 좋아하시면서 받으신다고 하셨다. 잘 되었다. 그냥 버렸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어수선했을 거다.


그 외에 피아노 소곡집이나 동요곡집과 같은 책은 따로 친정 엄마께 드리려고 싸 두었다. 우리 엄마는 어릴 때 피아노를 너무나 배우고 싶으셔서 그 꿈을 딸들에게 투영하신 경우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쉬운 곡들을 서투르지만 치고 계신다. 너무 어려운 악보들 말고 이런 악보를 더 좋아하시는데 그동안 그냥 내가 가지고 있었다. 진즉 드릴 것을....


그렇게 빼고 정리하고 나니 남은 것은 정말 좋아하는 책들 위주로 두 칸 정도 채울 분량이다. 악보에 대해서 미련이 서서히 적어지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으로 무료 악보 출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악보에는 거침없이 선생님의 지도가 들어가서 어차피 지저분해지게 되어 있다. 그 비싼 악보들이 연필자국으로 까맣게 덮여갈 때 마음이 아팠는데 선생님은 복사해서 작은 책처럼 만들어서 쓰라고 하셨다. 그래야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마음껏 넘겨가며 칠 수 있다고. 그래서 오래되었지만 안은 깨끗한 악보들도 많다. 이제는 집에서 안 치고 연습실에서 치니 무거운 악보를 굳이 들고 다니진 않는다. 복사하거나 출력해서 파일에 따로 담아서 다니니 정말로 악보를 더 줄여도 되겠다. 다만 나는 가끔씩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구경도 하고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의 개념으로 자주 치고 자주 듣는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있으면 되겠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것이라고 해서 다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오늘 한 번 더 생각했다. 곤도 마리에처럼 한 번에 확 정리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아직은 그렇게 못해서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빼 간다. 어제와 오늘은 안 쓰는 아기 의자와 오래되어 몇 번을 고쳐서 정말 잘 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을 제빵기, 그리고 전동드릴과 가습기도 같이 나간다. 문제의 딸아이들 방의 작은 책장 하나를 들어낼 날도 머지않았다. 다음 주에는...ㅁ자에서 ㄷ자로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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