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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로 Jul 27. 2024

파리 올림픽 선수단 소개 오류의 진실

대한민국을 북한으로 부른 오류는, 어쩌면, 예고된 인재

 파리 올림픽 개회식 선수입장 순서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의 소개 오류로 여론이 시끌시끌하다. 대한민국 선수단이 탄 배가 센 강을 지나갈 때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나라의 국호를 북한으로 잘못 부른 것이다. 사전에 제작된 자막과 보트에 부착된 사인보드에는 제대로 된 국명이 적혀 있었다지만 중계진이 대본에 나와있었을, 그리고 적어도 몇 번은 연습했었을 나라 이름 소개를 혼동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 선수단 입장 순서를 지켜보면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공식 명칭은 영어로 “Republic of Korea”이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긴 명칭을 DPRK, 혹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하는 것과 비교된다. 외국에 나와서 살다 보면 이 ”Democratic”이라는 표기 때문에 한국인의 국적을 북한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동독과 서독을 40년 넘게 헷갈려하던 버릇이 남한과 북한을 헷갈려하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아직도 많이 보이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나라의 영어명이야 공식 명칭을 번역하다 보니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아예 있을 수 없는 일 또한 아니다. 최근 종교 문제로 분리독립해 다른 나라로 출전한 수단과 남수단 중 어느 나라가 이슬람이고 어느 나라가 기독교 국가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외교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중국과 대만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북한 호명 사건”은 찜찜한 면이 있다. 보통 외국 사이트에서 한국 국적을 선택창에 입력할 때 한국인들은 사이트에 따라 서로 다른 국가명 표기를 목격한다. 내 경우 일단 Korea를 찾기 위해 K 항렬로 이동한 후 Korea, Republic of를 찾거나 Korea, South를 찾아본다. 이 방법으로 찾아지지 않는다면 S항렬로 이동해 South Korea를 찾아보는데, 그래도 찾아지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R항렬로 이동해 Republic of Korea를 찾아본다. 보통 외국에 나와 사는 한국인이 남한 사람이고 북한에서 외국의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이 없다 보니 한국은 그냥 Korea로 표기되거나 South Korea로 표기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공식적인 국명이 필요한 정부 사이트나 몇몇 정확한 정보를 선호하는 일반 사이트에서 Republic of Korea라는 이름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공식 명칭이 가장 적은 빈도로 출현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하나, 보통 외국에서 “나 코리아에서 왔어”라고 하면 99% 이상의 외국인이 남한에서 왔을 거라고 단정 혹은 추측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번 2024 파리 올림픽의 선수단 입장순서는 국명의 프랑스어 표기순으로 결정되었다. 올림픽 개회식에서 국가 입장 순서가 그 나라 언어의 사전에 나오는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암묵적인 관례이자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된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서울올림픽과 평창올림픽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앞에 위치한 가나, 가봉 등의 나라들이 먼저 입장했는데, 로마자 알파벳 G로 시작하는 나라들이 아르헨티나, 아르메니아 등 A로 시작하는 나라보다 앞에 입장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선수들에게도 흥미로운 사건이었을 테다. 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가 선두에 서고 당해 올림픽 개최국이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규칙, 이번 올림픽처럼 난민들의 팀이 두 번째에, 차기/차차기 올림픽 개최국인 미국과 호주가 각각 뒤에서 두 번째, 세 번째에 입장한다는 소소한 예외를 제외하면 각 나라의 국명이 어떻게 개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지, 그로 인해 입장 순서가 어떻게 정해지는 지를 보는 것은 일견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프랑스어를 포함한 로망스 계의 언어에는 영어 표기와 사뭇 다른 국가명이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어 미국은 영문 표기가 United States of America이므로 U로 시작하는 국가가 되지만, 이를 프랑스어로 표기하면 Les États Unis d’Amérique로 (정관사인 Les를 제외하면) E로 시작하는 국가가 된다. 마찬가지로 Republic of Korea가 공식 영어명인 대한민국과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인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불어 명칭은 각각 La république de Corée와 République populaire démocratique de Corée가 된다. 별칭이 되겠으나 자주 사용되는 남한과 북한은 각각 Corée du sud, Corée du nord로 번역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R로 시작하는 République나 C로 시작하는 Corée라는 단어 때문에 두 나라의 입장 순서가 근접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이번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단에 바로 이어 북한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파리 올림픽은 우리나라와 북한이 각각 48번째, 153번째로 입장해 중간에 100개국 이상의 나라들이 들어간 입장 순서가 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는 남북한의 앞뒤로 입장한 나라들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앞뒤로 입장한 나라들은 콩고, 쿡 제도, 코스타리카로 영문명으로는 C로 시작하는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어로도 마찬가지). 반면 북한의 앞뒤로 입장한 나라들의 국명은 포르투갈, 카타르, 루마니아로 P, Q, (북한), R로 시작하는 나라들이다. 대한민국은 Corée 혹은 Corée du sud, 북한은 République populaire démocritique de Corée로 인식하고 입장 순서를 정했다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이 대목만 따져도 규칙이나 일관성을 상실한 파리 올림픽 위원회의 무식한 일처리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올림픽과 같은 커다란 행사에서 개최국이 공식 국가명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나 생각이 없이 리스트를 작성해 실천에 옮기기까지 내부에서 아무런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국인 우리나라에는 대단한 외교적 결례겠거니와 내부적으로도 아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지점이 또 한 군데 있다. 개회식의 많은 부분 - 이를테면 프로그램의 일부나 마지막성화 점화자 - 이 비밀에 부쳐질 수는 있어도 선수단 입장 순서는 모두가 사전에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이다. 심지어 개회식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개최국 측에서 각 국가의 올림픽 선수단에도 이 정보가 사전에 투명하게 고지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몇 번째에 입장하는지는 국내외 다양한 언론에 이미 보도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이를 사전에 인식하고 파리 올림픽 위원회에 정정을 요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시말해 우리 중 누군가는 북한보다 우리가 먼저 입장하게 된 이 일을 개회식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의 영역은 조금씩 확대되어, 이런 망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 선수단 중 누군가는 국가명의 비일관성과 그로 인해 북한보다 우리가 먼저 입장하게 된 사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나, 굳이 북한보다 먼저 입장하게 된 상황을 뒤엎고 싶지 않았고, 복잡한 이름으로 인해 국가명 맨 뒤에 Corée가 위치하게 된 북한에 비해 Corée (du sud)라는 이름으로 입장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조직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부에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묵살했을 수 있다.

런던 올림픽에서는 DPRK와 ROK의 영어명 때문에 북한이 먼저 입장하고 한참 후에 대한민국이 입장하는 순서가 되었다. 올림픽 개회식 입장 순서가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J로 시작하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한발 늦게 입장하는 것도 껄끄러워하는 입장에서는 민감한 문제가 아니었을까?


 1991년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해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함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은 우리의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유사 국가단체에 다름 아니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중화인민공화국(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메인랜드 차이나)과 중화민국(대만), 홍콩, 마카오를 한 국가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하나의 중국“ 원칙은 대만도 마찬가지로 - 하지만 반대 의미로 - 주장하고 있다)


 북한과 같이 특수한 나라, 수십 년간 해온 행태를 보면 도저히 국가 같지 않아 보이는 국가, 특히나 625 전쟁을 통해 형용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국가에 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인 이벤트에서 입장 순서의 앞쪽을 내어준다는 일은 속이 쓰린 일이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독재와 가난으로 유명해진 나라의 이름으로 우리가 호명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조직위원회의 오류를 사전에 알고도 정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국가명을 잘못 호명한 것에 모든 언론이 들고일어나는 일에 우리는 흠이 없이 당당할 수 있을까? 좋은 일에는 침묵하고 나쁜 일에는 목청을 높이는 우리의 모습에,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옳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었을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해당 사건과 관련해 프랑스 현지에서 보도된 기사 링크를 싣는다. 기사에 따르면 개회식의 장내 아나운서는 대한민국을 북한으로 호명했을 뿐 아니라, 수도인 서울이 상시 전쟁상황에 놓여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https://www.ladepeche.fr/2024/07/27/jo-de-paris-2024-grosse-gaffe-des-organisateurs-ils-ont-confondu-le-nom-officiel-de-la-coree-du-sud-avec-la-coree-du-nord-12106428.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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