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기록하는 2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선거 관전기
정치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지식도 일천하여 조금 조심스럽지만, 말도 탈도 많았던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해외에서 관전한 기록을 남긴다. 태극기의 가운데 부분을 옆으로 돌려놓은 듯 빨강과 파랑이 국토를 동서로 가르고 있는 모습을 "다시금" 보며, 몇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목도한다. 군사정권이 오래전에 무너지고 민주적인 선거문화가 정착 중이라고는 하나, 국민들의 열망에 반해 그 속도는 많이도 더딘 느낌이다. 2024년 현재 노르웨이의 가장 마지막 선거는 2023년 지방선거였으며, 가장 최근의 국회의원 선거는 2021년에 있었다. 나는 한 번은 뉴스와 지인의 경험담으로만 선거를 접하고 다른 한 번은 유권자로서 직접 권리를 행사한 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고 싶은가. 5년째 살고 있는 북유럽의 정치 문화에서 그 해답을 구해본다.
1. 다당제의 나라
노르웨이의 정치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노르웨이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대통령 선거가 없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되면 보통 그 당의 수장이 총리가 되어 4년간의 임기를 시작한다. 국회의원의 수는 168명으로 우리나라의 반절에 불과하지만, 총인구가 6백만을 밑도는 나라라 적은 수라고 볼 수만도 없다. 국민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거의 중요성이 워낙 강조되는 나라라, 선거일은 임시공휴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먼 길을 달려 기꺼이 투표를 하러 온다.
노르웨이에서는 내가 투표한 정당이 다수당이 될 수는 있지만 과반 정당이 되기는 상당히 어렵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미국처럼 거대양당 아래 다수의 군소 정당이 모여있는 상황인 반면, 노르웨이는 9개의 "중형" 정당이 168석을 나눠가지는 형국이다. 계산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9개의 정당이 성향별로는 우파, 좌파, 중도파로 정확히 3개의 당씩 나누어져 있다. 같은 우파라도 다른 정당의 정책에 얼마나 우호적이냐에 따라 또다시 갈라지는 것이다. 세 개의 색깔이 있는데 각 색깔에는 세 가지 다른 농도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유권자는 우파냐 좌파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색깔에 농도를 더하여 투표를 할 수 있다. 선택의 차원이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다수정당제에는 단점도 많이 있다. 다수당이 아무리 많은 득표를 해도 현실적으로 총 의석의 30%를 넘기기가 힘들기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 다른 정당들과의 연합이 필수적이다. 다른 당들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이 당과 정치적인 방향이 같을지라도 정책의 논리성이나 현실성을 따져본 뒤 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수당을 견제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많은 토론과 설득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므로, 정책의 결정이 효율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일당독재 식의 막무가내적 입법통과가 제도적으로 저지되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또한 특정 정당이 싫어서 반대 당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정치적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 정당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정당이 가진 의석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때에 따라 캐스팅보트를 가진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미움의 정치, 보복의 정치, 비호감 대결의 정치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특정 정당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딱히 선택할 대안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나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정당이 균형 있게 분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2. 국회의원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국회의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물론 우리나라도 점차 그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처음 떠오르는 모습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아저씨와 할아버지 사이의 중노년 남성이 아닐지 모르겠다.
노르웨이는 정치에 대한 열린 토론을 적극 지지하는 사회 분위기덕에 의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그래서 다른 나라의 의회들보다 구성원이 전체적으로 젊고 활기차 보인다. 60년대 생인 현직 총리 아래로 19개 부처가 있는데, 그 부처의 수장인 장관급 인사가 60년대 생에서 80년대 생까지 3-4명씩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심지어 90년대에 태어나 장관을 맡고 있는 인물도 둘이나 있다. 성비는 짜맞춘 듯이 10명의 남성과 9명의 여성. 국회의원의 면면도 이와 비슷하여, 총 168명의 의원 중 30대가 39명, 20대도 13명이나 된다. 의원의 성비 역시 일부러 그런 것처럼 남녀가 거의 동수로 뽑혀있다.
이 통계를 보면서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국회의원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국회의 성비와 연령비도 실제 사회와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젊은 의원의 치기 어린 정책을 나이 든 의원이 같이 검토, 보완해 주고, 나이 든 의원의 구시대적인 발상은 젊은 의원이 미래지향적인 시각으로 수정, 발전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젊은 피가 없는 우리 국회에서 논의되는 법안들이 과연 젊은 세대의 시각을 거쳐 발의된 것들일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젊은 세대가 필요한 법안을 그렇지 않은 세대가 국회에서 대신 논의하고 가결해 주는 것이 옳은 모습일까?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한편 선거권은 없지만 이 나라의 미성년자들이 장외(?)에서 모의 선거를 하고 정치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 또한 매우 바람직해 보였다. 노르웨이의 선거권은 만 18세가 되는 날 주어지지만, 정당에 가입하는 등의 정치 활동은 만 15세부터 가능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정치에 눈을 뜬 청소년들이 각종 TV 프로그램에 나와 성인들과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 않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들이 유권자가 될 것이므로, 일명 "아이들의 선거(Barnas valg)"라고 하는 장외 선거의 결과에 각 정당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인들은 만 18세 이상의 유권자뿐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국민이 지지할 수 있는 법안을 찾아 어디든 가야 하는 숙제를 안고 살게 된다.
3. 내가 지지하는 정당을 알려드립니다
선거기간에 매우 여러 차례 정책토론을 하는 것도 인상적이긴 하지만, 면접 몇 번으로 훌륭한 신입사원을 뽑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낯선 후보자들 사이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럴 때 사회적인 문제들을 질문 형식으로 만들어 어떤 정책을 선호하는 지를 스스로 체크하면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정당과 몇 %나 연관성이 있는지 알려주는 valgomat이라는 웹페이지는 우리나라에도 적극 소개하고 싶을 정도로 신선하다. 내가 받은 질문지는 총 15개의 문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오슬로의 교통체증을 줄이기 위해 시내로 들어오는 통행료를 올리는 것이 바람직한가"와 같은 질문에 매우 지지-다소 지지-중립-다소 반대-매우 반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2021년 당시 내 경우에는 현 집권정당(다수당)인 노동당과 일치도가 65%로 나왔지만 구정권인 우파당과의 일치도도 60%가 넘었던 것으로 보아 두 정당이 성향은 다르지만 특정 현안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진단할 수 있었다. 같은 질문지를 모든 선거 후보들이 받고 작성하기 때문에, 특정 후보를 찍어서 그 후보가 나와 얼마나 비슷한 답을 했는 지도 바로 비교할 수 있고, 심지어 당선인들의 답을 보면 사회 현안에 대해서 의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는지도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다. 항상 투표일 직전까지 지지 정당,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유동층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선거 역사에 비추어볼 때, 내 지역의 어떤 후보가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고 어느 정당에 투표를 할지 선택할 때 참고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각 후보자들이 이 설문을 선거기간이 오기 전에 이미 작성하고 언론에 발표했기 때문에, 선거 기간 중 말바꾸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당들은 일견 서로 간에는 뚜렷한 색깔을 지닌 듯 보이지만, 우리는 선거 말미가 되면 그들 대부분이 선심성 포퓰리스트가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차피 선택은 유권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valgomat은 정치인들이 말바꾸기를 일삼아 판단을 흐리게 할 때 중심을 잡아줄 바로미터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국내 도입을 권할 만하다.
아마 이런 제도와 도구를 만들기까지 노르웨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전쟁의 역사, 가난의 역사가 있었고 주변의 강대국에게 합병되거나 할양되는 오욕의 역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정치를 하는 나라 중 하나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높다. 악명높은 세율로 세금을 걷고 그 돈을 운영할 사람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공약의 이행도도 높고 이를 감시, 보고하는 체계도 매우 투명하다. 내 경우 2023년에 지방선거 투표를 위해 홍보물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후보의 공약 중 하나가 마음에 걸렸는데, 당선되면 정말 그 공약을 반드시 지켜낼 것만 같아 그 후보에게 투표를 하지 않은 적이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은 해마다 상승하고 있지만, 저 아래에서 항상 발목을 잡아끄는 것은 "정치적 성숙도" 항목이다. 순위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치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뽑는 사람과 뽑히는 사람 모두가 정치적으로 성숙한 길을 걷기 위해 2인3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정치의 열매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눠가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