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승리, 그 달고도 쌉쌀함에 대해

2025 노르웨이 총선으로 곱씹어보는 바람직한 정치제도

by 히어로

4년마다 치러지는 노르웨이 총선 (Stortingsvalget)이 방금 끝났다. 선거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지만 의석 수는 생각보다 팽팽해 역대급으로 스릴 넘치는 총선이었다고 한다. 승리한 정당도 마냥 안심할 수 없고, 패배한 정당도 할 말이 생긴 선거. 어떻게 가능했을까?


노르웨이의 정치 지형을 파악하려면 정당의 숫자와 색깔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노르웨이에는 현재 22개의 정당이 있는데, 그중 선거에서 1% 이상의 지지율을 꾸준히 기록하는 정당만도 9개에 달한다. 이번 선거는 아르바이데르파르티에(Arbeiderpartiet, Ap), 우리말로 하면 “노동당” 정도로 번역되는 정당이 지난 선거에 이어 두 번 연속 승리하여, 현 총리인 요나스 스퇴레(Jonas Støre)의 정권이 4년 연장되는 결과를 남겼다.


현 노르웨이 총수이자 최대 다수당 Arbeiderpartiet의 대표인 요나스 스퇴레(오른쪽 빨간 넥타이)와 당 관계자들 (출처:vg.no)

선거에 승리했다지만 노동당이 거두어들인 표수는 전체 투표수의 28%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지난 선거에 비해 1.8% 정도 높은 수치로, 표심을 그런대로 유지했다는 해석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지난 선거에서 11.6%의 득표에 그쳤던 프렘스크리츠파르티에(Fremskrittspartiet, Frp)가 13.2%를 더 받은 득표율 24.8%를 기록하여 2위 정당으로 발돋움한 점이 더욱 부각된다. 반면 우파 정당의 기둥이자 노동당 집권 이전 총리를 배출했던 회이레(Høyre, H) 당은 지난 선거 대비 6.1%가 떨어진 14.3%의 득표율로, 거의 추락에 가까운 지지율 하락을 기록했다.

2025 노르웨이 총선 주요 정당 지지율 (최종 득표율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 출처 vg.no)

사족이지만 노르웨이 주요 정당의 이름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몇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정당의 이름들이

꽤나 직관적이다. 앞서 언급한 회이레 당은 “오른쪽(høyre)”이라는 단어를 당명에 그대로 가져다 썼다. 말 그대로 오른쪽 당, 우파 정당이라는 이름과 정치색을 가졌다. 그렇다면 왼쪽 당도 있을까? 있다. 벤스트레(Venstre, V) 당의 이름은 ”왼쪽“이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벤스트레 당이 노르웨이 정치계에서는 우파 계열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당명과 정치색이 함께 가지 않는 사례는 프렘스크리트 당에서도 발견된다. 우파 계열로 분류되는 이 정당의 이름 프렘스크리트(Fremskritt)는 “진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앙당”이라는 의미의 센테르파르티에(Senterpartiet, S)는 말 그대로 중도이긴 하지만 과거 농민들을 대표하는 정당으로서의 역사가 있어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진 중도 좌파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 외의 정당들은 대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당명과 정치색을 가졌다. 이번 선거의 승자인 아르바이데르 당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좌파 계열이다. 좀 더 과격(?)한 성향의 사회 좌파당(Sosialistisk Venstrepartiet, SV)도 5%를 넘는 지지율로 좌파 계열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슷한 지지율을 기록한 뢰트(Rødt, R) 당은 “빨간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공산당“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 그대로 당의 정체성이 “(건전한 정치세계의 언어로) 빨갱이 집단”인 것이다.


노르웨이의 선거는 “The winner takes it all”의 승자독식 잔치판이 아니다. 9개의 주요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면 과반수 득표는 한낱 꿈과 같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선거의 승리는 좌와 우를 각기 합친 “정당 그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물론 좌우 중 한쪽 계열이 승리를 하면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어 국정 운영을 수월하게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수를 이루는 정당 그룹 사이에서도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투표 거부를 하거나 아예 반대쪽에 투표하여 법안 통과를 저지할 수도 있다.


나는 다당제의 장점과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승리한 정당이 때때로 과반 의석을 실현하여 모든 법안을 당론에 따라 처리하고, 반대 당은 투표 참여와 무관하게 모든 의견이 묵살되고 장외에서 상대편의 ”독주“를 막자고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노르웨이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인 것이다. 오히려 같은 정치색을 가진 소수 정당이 다수당을 비판하고 다그치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일례로 선거 막바지 토론 방송에서 “빨간색 당”의 당원이 이-팔 전쟁국면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왜 더 크게 내지 않냐고 집권당 토론인에게 강하게 어필한 적이 있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정권을 잡은 정당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장차관급 인사 물갈이나 반대당 인사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같은 집 식구들의 문단속, 혹은 경우에 따라서 반대편 당과의 융화이다. 이를 정치용어로는 상대 당과 손을 잡는 “연정”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연정은 위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연정은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필요로 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면 뜻대로 진행되는 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반대로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비록 소수 정당이더라도 다수당 혹은 집권당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이므로 기꺼이 소신대로 투표를 할 수 있다. “상대 세력에게 패배하지 않기 위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투표하는 경우가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녹색환경당 (Miljøpartiet De Grønne, MDG)는 이번 정권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막강한 권력의 정당이다. 이 정당은 환경보호를 위해 산유국인 노르웨이에서 추가적인 석유 채굴을 중단하자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중도 성향의 MDG 당의 판단에 따라 법안의 통과여부가 가려지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게될 것이다 (출처: vg.no)

우리나라도 언젠가 다당제의 장점이 나타나던 때가 있었다. 지지율이 높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존재감이 있고 많은 경우에서 다수당과 의견을 같이하지만 때로는 다른 목소리를 내곤 했던 그 정당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흡수되거나 해산되거나 지리멸렬하게 되고 말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도는 마치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보는 것과 같이 절반으로 분열되어 그 간극을 메울 방법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이런 정치 판도는 융합과 설득보다는 반대와 혐오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투표권자들은 모두 정말로 트럼프를 좋아해서 그에게 표를 던졌을까? 비호감의 선거, 덜 싫어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선거는 이제 우리의 정치문화로도 굳건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 국력에 비해 정치만 한참 뒤처졌다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미래 정치의 모습은 무엇인가? 무늬만 다당제, 사실상 양당제인 나라가 하지 못하는 모습을,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끝인 노르웨이가 오늘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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