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며칠 뒤, 민수의 임대아파트단지 엘리베이터 안에 새로운 공지가 붙었다. 테이프로 대충 고정된 A4 한 장이었다. 흰 배경에 자잘한 검은 글씨가 딱 봐도 ‘중요한 말은 많은데 확정없는’ 문서였다. "정비사업 주민설명회 안내문" 제목만 그럴듯하게 굵직하게 박혀 있었다. 맨 마지막 줄에 적힌 ‘향후 일정은 변동될 수 있음’이라는 한 문장을, 민수는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문장만을 한참을 바라봤다. '변동될 수 있음'이 말뜻을 굳이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었다. 당신의 삶도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준비는 각자 알아서들 하세요. 민수는 자신이 왜 이 문장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는지 알 것 같았다. '주거안정'이란 단어가 임대차계약서 어딘가에 명시되어 있기는 한가 모르겠다. 그의 현실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깃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민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뒤에서 누군가 “내리세요” 하고 말해줘서야 겨우 발을 뗐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여기 들어와서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나, 또 시험대 위에 올라가 맘 졸이게 생겼네.’
설명회 날, 아파트단지 근처 체육관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운동화 바닥이 체육관 바닥을 쓸며 내는 소리, 희미한 조명, 그리고 북적대는 사람들로 텁텁한 실내공기가 거북했다. 민수는 이런 장소에 오면 늘 몸이 먼저 긴장했다. 결정권은 늘 저 앞에 있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결과를 기다리는 쪽이라는 걸 이미 여러 번 배웠기 때문이다. 앞쪽 스크린에서는 사업시행자 측 PPT가 송출되고 있었다. ‘미래 가치’, ‘주거 환경 개선’, ‘지역 활성화’라는 단어와 함께 화려한 조감도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민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래는 가치고, 현재는 참고사항이네."
이 자리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은, 마치 자료의 각주처럼 취급되는 느낌이었다.
질문 시간이 되자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뚱뚱한 아저씨가 손을 번쩍 들고 마이크를 뺏듯이 잡았다.
“이거 되면 우리 동네 뜨는 거죠? 새 아파트 들어오고, 상권도 좋아지고?”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를 쳤다. 민수는 그 박수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다들 잘 살고 싶을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박수 속에는 ‘다 같이 좋아질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해졌다. 체육관 안 공기가 한 톤 밝아졌다. 곧이어 조금 뒤쪽에서 젊은 여성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저희는 임대인데요. 이주 기간 동안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건지, 아직 확정된 공지가 없어서요.”
민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대신 말해준 기분이었다. 순간 체육관 공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진행자가 웃음을 띠며 답했다.
“임대 관련 부분은 관계 기관과 협의 중이고요, 원칙적으로는 최대한…”
'원칙적으로', 민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원칙적으로’는 늘 ‘확정은 아니다’의 다른 말이 따라붙었다. 그는 그 말 뒤에 항상 따라붙는 침묵을 알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각저 알아서 자기 삶을 계산해야 했다.
설명회가 끝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말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요즘 이런 호재 흔치 않아.”
"이주비는 얼마나 나올까?"
“임대도 어쨌든 해결해 주겠지.”
민수는 해결이라는 말이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해결은 늘 결과로 와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희망처럼 먼저 소비되고 있었다. 그는 체육관을 나와 단지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았다. 철제 미끄럼틀은 이미 아이들보다 햇볕에 더 많이 닳아 있었다.
민수는 그 미끄럼틀을 보며 생각했다.
‘여기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오늘 손뼉 친 사람들일까?’
잠시 멍 때리다 전화를 걸었다.
“준호야, 다들 축제야. ‘새 아파트’ ‘프리미엄’ 이 단어들만 계속 나와.”
민수의 목소리에는 설명하기 힘든 피로가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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