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작은 시작

연재소설

by 미아


9장. 작은 시작



여름이 오는 것도 모르고 하린은 거의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창밖의 소음은 줄어들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오히려 더 시끄럽고 복잡했다. 공모 제목은 아주 거창했다. ‘미래도시 청년 공유주거형 모델 확장 사업.’ 프린트물 상단에 큼지막한 그 문구를 볼 때마다 하린은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미래도시라니... 확장이라니... 정작 그녀가 떠올리는 얼굴은 미래의 누군가가 아니라, 오늘 밤에도 월세 자동이체 알림을 확인하며 한숨 쉬는 친구들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하린이 진짜로 만들고 싶은 건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지만 아늑한 공간이었다.


새벽 두 시쯤, 스튜디오 바닥은 여느 때와 같이 어지럽다. 컵라면 용기와 맥주캔, 편의점 커피통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환풍기와 선풍기가 연신 돌아가고 있었지만, 공기는 눅눅했다. 하린은 도면 위에 연필을 가져가 ‘공용부 20cm 확장’이라고 적었다. 아주 작은 숫자라도 더하고 싶었다. 발표 자료로 설명하면 한 줄이면 끝날 수정이지만 그 20cm 안에는 그녀 나름의 간절함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와 어깨를 스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거리, 퇴근 후 지친 얼굴로 복도에서 마주쳐도 괜히 “아, 죄송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쓸데없이 피해 다니거나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동선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린은 연필을 내려놓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요즘 집은 너무 좁아서 몸도, 마음도, 물건들도 먼저 알아서 줄어든 느낌이 든다.


발표 당일 아침, 하린은 발표 자료를 들고 서서 손톱을 몇 번이나 뜯고 있었다. 태현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린, 긴장하면 손톱부터 뜯는 거 그거 좀 고치자.”

하린이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고치기엔 세상이 너무 자극적이야. 알림, 공고, 경쟁률, 조건… 손톱이 남아나질 않아.”

“그래도 오늘은 좀 남겨 둬. 좋은 날이잖아.”

“좋은 날이 제일 두려운 거 알지?”

그 말에는 농담 같은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속에는 진심이 들어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잠시 뒤, 휴대폰이 울렸다. 하린은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하린 팀이 선정되셨습니다.”

담당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린은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만 예산은 일부 조정될 수 있고요, 성과지표가 수혜자 수 중심이라 설계안도 조금…”

하린은 본능처럼 말을 끊었다.

“수혜자 수를 늘리는 건 좋아요.”
“근데요.”
“사람을 숫자로만 보지는 않게 해 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몇 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하린은 혹시 너무 나갔나 싶어 숨을 삼켰다.

“그… 거주자 만족도 항목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협의해 보겠습니다.”

담당자의 말은 확답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거절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하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쁨이 먼저 와야 할 순간이었지만, 마음 한편이 서늘했다. 종이 위의 선이 진짜 사람의 삶이 되는 순간. 그 무게가 갑자기 현실로 내려앉았다. 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하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 지금 솔직히… 좀, 너무 부담된다.”

“뭐가?”

“내가 그린 선 때문에 누군가는 편해질 텐데, 누군가는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 그 책임이 다 내 것 같아서.”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임, 혼자 지는 거 아니야.”
“모두 함께 지는 거지.”

그 말에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같이.'

"요즘 같을 때, 이 말이 이렇게 든든한 말이었다니..."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참 고마웠다.


그날 저녁, 셋은 민수까지 불러 동네 작은 술집에서 모였다. 간판도 없이 저녁에만 잠깐 문을 여는, 아는 사람들만 오는 그런 곳이다. 좁은 실내에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자만 손님들 누구도 다른 테이블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 오면 각자의 행성으로 떠나는 기차에 탑승한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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