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듣겠다고 이야기하자 순차적으로 레벨테스트가 진행되었다. 면담실로 들어가 잠시 기다리니 금발의 백인 여성이 들어와 레벨테스트를 진행했다. 나름 영어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였던 지라 그래도 어느 정도 높은 레벨로 들어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Okay. What's your name and how old are you?"
"I'm Cho and twenty five."
간단한 질문에 간단한 대답으로 응대했다. 영어를 어느 정도 한다고 믿었던 나는 편안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대답을 고쳐주었다.
"My name is Cho and I am twenty five years old."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말과 나의 대답은 정확히 같은 의미였기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어리둥절한 나에게 그녀는 한번 더 질문을 던졌다.
"What is your Hobby?"
그녀의 질문 중 'hobby' 의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 몇 번을 되물었다. 한국에서는 ‘하비’로 배웠지만, 그녀는 아주 정확하게 ‘호비’라고 발음했다. 한참을 '호비가 뭐지?'하며 혼자 고민하고 있자 그녀가 질문을 다시 이야기해주었고 기적적으로 ‘호비’가 ‘하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Oh! Football."
"My hobby is playing football."
다시 한번 그녀는 나의 대답을 바로 잡아 주었다. 그랬다. 내가 대답한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였지만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법을 알려줌으로써 회화를 통해 영어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가려는 방식이란 걸 후에 수업을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똑같은 의미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 짜증도 났지만, 대답을 교정해 주는 과정이야말로 기본을 다지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교정을 통해 문법적 이해도 증가했고, 영어라는 것을 학문이 아닌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How long have you been here?"
아직도 이 질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의도를 그때는 내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Have' 의문문(현재완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다. 사실 이 문장은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단순한 문장이다. 현재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의미적으로는 과거 시점부터 연속적인 상황을 묻는 것이지만 과거형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간단하게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니?' 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직독직해를 하라고 교육받은 나에게 이 문장은 익숙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가지다, 너는, been???, 여기'. 나는 아직 be 동사에 대한 올바른 의미나 개념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I have been here for 3 days.' 였지만, 당연히 자연스러운 대답이 이어질 수 없었다. 대충 직감으로 대답을 해야 했다.
"One year."
1년 동안 있을 거라는 의미로 대답했다. 그녀는 나의 대답을 듣고는 아마 '1년이나 됐다고? 근데 영어를 이렇게밖에 못해? 안되겠군, 기초반부터 시작해야겠어.'라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맥도날드에서 면접을 볼 때도 같은 질문을 들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회피했던 것 같다. 스스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이 정도 간단한 문법도 회화도 되지 않는 내가 내심 높은 레벨을 기대한 것도 부끄러웠다.
나의 영어실력 테스트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이 났고, 나는 전체 4개 레벨 중 2번째 레벨의 교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학연수를 가기 전에 경험자들이 이야기하길, 한국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해서 처음부터 높은 레벨로 들어가지 않으면 시간 낭비가 심하다고 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사실 처음부터 높은 레벨에 들어갈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높은 반에 들어가서 더 고급의 영어를 배우는 게 맞겠지만, 자신의 영어 실력에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든다면 기초부터 확실히 하고 넘어갈 것을 권한다. 기초를 확실히 한다는 것이 중학교 과정 3년을 다시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낮은 레벨의 수업에 들어가면,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한 사용법을 몰랐던 상당 부분을 다시 배우게 된다. 기본적인 문법이나 어휘의 사용법을 익히고 나면 그것들을 활용한 다양한 응용이 가능해지고, 사실 대부분의 회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학교에서 아마 'used to'라는 표현을 수 없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 표현은 과거에 "~하곤 했다."정도의 뜻으로 과거의 습관이나 경험에 대해 설명하는 표현이다. 한국어로 설명을 들으면 '그렇구나'하는 정도의 감흥만 있을 뿐 이 표현에 대한 정확한 활용은 어렵다. 낮은 레벨의 수업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아주 기본적인 이러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최소 5명 이상 모여 있다. 그들과 이 표현을 사용하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수 없이 이 표현을 반복한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더 다양한 표현을 들려주어 표현의 활용도를 넓게 해준다.
I used to run fast.
I used to be fat.
I am getting used to it.
이러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기본적인 시제의 활용법과, 다양한 기초 어휘의 사용방법을 익히게 된다.
일단 기본적인 방법과 메커니즘을 이해했다면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레벨이 낮은 수업을 계속 듣는다는 건 지저분한 걸레로 방을 계속 닦는 것과 같다. 더는 깨끗해질 수 없는 바닥처럼, 아무리 오랫동안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발전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2번째 레벨을 한 달 정도 경험한 후 지루함을 느꼈고 곧장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레벨테스트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하여 바로 3단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사실 선생님은 레벨테스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면담만을 거친 후 나를 다음 레벨로 올려주었다. 빨리 영어 실력을 늘려야겠다는 조바심이 들어 처음부터 높은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면(물론 올라가는 것 자체도 어렵겠지만) 기본적인 문법이나 표현이 부족해서 다양하게 응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지만 한술 밥에 배부를 수도 없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레벨테스트를 마치고 교제를 수령한 후약간의 안내를 들은 탓에 첫 번째 수업을 빼먹고 두 번째 수업부터 참석하게 되었다. 수업은 조금 전 레벨테스트와 비슷하게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선생님은 각자의 대답을 교정해 주면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나와 비슷하거나 낮은 레벨의 학생이었고, 그중에는 한국인도 서너 명 섞여 있었다. 첫 수업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듣고만 있었다. 수업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수업 방식 또한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아 매우 만족스러웠다. 내가 선택한 학교는 당시 런던에 단 두 개만 존재하는 회화 중심의 학원이었는데, 문법과 어휘를 중요시하는 영국인들의 성향 때문인지, 시험을 중시하는 외국인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 영국의 어학원들은 한국의 입시학원처럼 문법을 기반으로 과제와 시험에 집중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가 진학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진학을 위한 교육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첫날 어학원의 수업이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자 이제는 '한 번 해보지 뭐'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학원이 끝난 후 곧장 집으로 달려가 '런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적어왔던 런던 생활의 계획들은 모두 빗나갔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위해 다시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어려서부터 나에게 만연해 있던 결정력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하얀 종이 위에 결정해야 할 항목들의 장/단점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머릿속에서 표류하던 생각들이 종이 위에 나열되어 누가 보아도 명확한 ‘사실’로 변하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하얀 종이를 꺼냈지만, 적어 내려가야 하는 내용은 결정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결정은 이미 머릿속에서 나 있었고, 이제는 '어떻게 이 결정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야 했다.
100만 원(약 500파운드) 이라는 예산을 제일 위에 크게 적고 해결해야 할 항목들을 나열해 봤다. 집값, Deposit(보증금), 교통비, 식비, 통신비... 가장 필수적인 것만 나열했다. 나머지 비용들은 없이 살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이미 나의 재정상태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픽업을 도와준 분을 다시 찾아갔다. 일단 머물러 보기로 한 이상 최대한 저렴하게 방을 구해야 했다. 그분의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한국인 집주인이 나왔고 집주인은 나를 그분의 방으로 안내했다. 아주 작고 아담한 방에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가 전부인 방은 사실 아주 작긴 했지만 아늑해 보였다. '이 정도 방이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늑한 방의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한달 가격이 250파운드. 당시 2,000원 하던 환율을 고려하면 약 50만 원이었다. 나름 괜찮아 보이더니 과연 비쌌다. 집주인과 함께 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집주인 분은 3층 옥상을 방으로 개조해 살고 있었고, 쉐어하는 방은 총 3개였는데, 그중에 하나는 나를 픽업 나왔던 분의 방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아직 비어 있다고 했다. 금액을 묻자 나에게 각 방의 가격을 설명해 주었다. 크기가 다른 트윈 룸이었던 방들은 각각 한 달에 360파운드(72만 원)/400파운드(80만원) 였고, 이 금액은 나에게 너무도 비싼 것이었다. 하지만 각 방에 룸메이트를 받아서 생활하게 될 테니 방값은 절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사실 풍족하지 않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이용되는 방식이다.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룸메이트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주 효율적이다. 물론 룸메이트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생활이 상당히 달라지지만 말이다.
절반의 가격이라는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180파운드로 월세를 내고 180파운드로 보증금을 내면 내가 가지고 있던 500파운드에서 140파운드나 남게 된다.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했고(사실 계약서를 따로 쓰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비용은 이사하면서 지불하기로 했다. 민박집으로 가서 짐을 꾸리고 나오면서 5일간의 숙박비 100파운드를 먼저 지불해야 했다. 10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니 나에게 남은 돈은 400파운드. 방값으로 360파운드를 빼면 40파운드가 남아있어야 했지만, 5일 동안 생활비로 일부를 써버린 내 수중에 남은 돈은 약 20파운드가량이었다. 이마저도 1주일 치 교통카드를 사면 5파운드가 남게 되고 영국에서의 5파운드는 한국의 5천원 정도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문자 그대로 빈털터리 직전의 상황이었다. 짐을 챙겨서 민박집을 나오면서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일단 이사를 하기로 했으니 커다란 이민 가방을 옮기는 것부터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