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채가 들려주는 영국 유학 이야기

2장 계획되지 않은 도전

by 쪼꼬

Chapter 24. 진정한 여유

첫 출근 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실장만 혼자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실장은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업을 준비 중이어서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한인회 직원은 현재 나를 포함해 두 명이고 오후에 한 명이 출근할 테니 그분에게 업무에 관해 물어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우선은 어질러져 있던 한인회관을 청소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그는 떠나갔다. 혼자 남은 내가 청소를 마칠 때쯤 하얀 얼굴에 차가운 인상의 한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실장이 말한 오후 출근자였다. 자신을 인규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한인회에 취업한 지 6개월 정도 되었고, 당시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학생이었다. 나보다 5살이 많았던 인규형과 나는 이후 사이가 돈독해져 영국 생활 내내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오후 4시 정도가 되자 한인회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TV에서 본 여느 회장님과 같이 후덕한 외모에 기품이 있어 보이던 그는 S물산 주재원 출신으로 지금은 영국에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젠틀하게 웃음 짓던 한인회장님과 인사를 나눈 뒤 인규형을 통해 한인회의 이모저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인규형은 자신이 한인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한인회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인회장은 생각보다 상당히 디테일하고 꼼꼼한 사람이어서 그와 함께 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인규형은 영국에 오기 전 7년 동안 S전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는데, S사의 일하는 방식이 싫어서 영국으로 온 그에게 다시 S사 출신 상사와 일하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한인회라는 좁은 사회 안에서도 서로의 친분을 중심으로 계파가 갈리고 있었고, 무엇을 위해서인지 저마다 심하게 날이 서 있는 분위기였다. 내가 입사하기 조금 전 마친 한인 축제 때문에 더 그러하기도 했다. 한인 축제를 진행하면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혔던 듯하다.


본격적인 한인회 업무를 시작하고 난 후에도 당분간 나에게 주어진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은 인규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록해둔 어학원 수업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에 한인회의 생활은 말 그대로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매일 아침 8시까지 출근을 하고 오전에 사무실을 지키면 오후에는 인규형이 와서 업무를 보고 나는 전화로 온 문의 사항 등을 인규형에게 인수인계 후 퇴근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대게 오후 4시 전후면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한여름의 런던은 여유를 부리기에 아주 적절했다. 해는 밤 10시까지 지지 않았고, 높은 온도에도 습하지 않아 끈적이지 않았다. 때마침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 와 한 달간 머무르게 되어 런던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어학연수 때와는 다르게 생활도 안정되어 있었고, 학교에 대한 부담도 적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런던을 즐겼다. 주중 어느 때라도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길 수 있었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운동하며 런던에서의 생활을 고스란히 즐겼다. 아침 일찍 출근해도 업무가 별로 없으니, 근무가 부담될 것도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기껏해야 한인회비를 내지 않은 주재원들과 재영한인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회비 납부를 독촉하는 일이었는데, 사실 독촉보다는 상기시키는 수준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하루에 서너 건씩 천천히 진행했기 때문에 일 자체가 버겁지는 않았다


해외에서의 생활은 여유로운 편이다. 런던의 많은 회사가 일찍부터 탄력적 근무제도를 채택하여 실행하고 있었다. 보통 출근은 아침 9시까지이지만 눈이나 비로 인한 교통 상황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적당히 조절할 수 있다. 회의나 토론을 위한 공식적 근무시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알아서 스케줄을 조절하고 8시간 근무를 마치면 퇴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유혈사태 없이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는 영국인만큼,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철저하게 보장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최적의 생산성을 내는 것이 영국인들의 방식이다. 주말이건 주중이건 장시간 근무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대한민국 사회와 대조된다. 심지어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면 영국인들은 삼삼오오 펍(Pub)에 모여 축구나 크리켓을 보며 여유를 즐긴다. 과거 영국 노동자들(특히나 템스강 주변의 뱃사람들)의 주급이 지급되던 날이 목요일이었고 때문에 매주 목요일 오후는 일찍 일을 마친 후 펍에 모여 한주의 피로를 달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이 현재에는 사무직을 비롯한 대부분의 근로자에게 퍼져, 매주 목요일이면 일찍 퇴근한 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탄력적 근무제를 도입한 몇몇 회사들이 있지만, 아직 실질적 효과를 거두는 곳은 많지 않다.


영국인들의 휴가 방식도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국은 구정과 추석에 각각 거의 5일간씩 휴가를 가지만, 영국은 이렇다 할 대형 명절이 없다. 기껏해야 Bank Holiday라 불리는 몇몇 기념일 뿐이다. 대신 영국인들은 1년에 평균 3주의 휴가가 주어지고 3주의 휴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주말을 제외한 휴가일이 21일 정도이기 때문에 주말을 포함하면 한 을 일하지 않고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영국은 여행산업이 상당히 발달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도 연차를 사용하면 1년에 15일 정도 휴가를 쓸 수 있지만, 이 15일을 한꺼번에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연차를 쓰려고 하면 이내 회사 일이 걱정된다. 내 일을 누가 대신해줄지, 휴가를 다녀오는 것에 대한 상사의 평가는 어떨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휴가를 가지 않고 급여로 대신 지급받기를 원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영국은 휴가를 가는 순간 대부분의 업무에서 배제된다. 담당하는 업무가 어떠한 것이든 담당자가 휴가 중이라는 말로 거의 모든 일이 미뤄진다. 내가 일을 의뢰하는 사람이라면 속이 터지겠지만, 휴가를 떠나는 당사자로서는 행복할 일이다.


런더너들의 생활이 이렇다 보니 여유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밖에 없다. 아침 시간 여유롭게 출근하고, 점심이면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즐기고, 늦지 않은 시간에 퇴근해 가족들과 집에서 여유를 즐긴다. 이러한 여유로움이 주변에 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 여유가 생긴다. 시간은 한없이 천천히 흐르고 무엇 하나 바쁜 것이 없다. 여유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여유로울 때 비로소 나도 여유로워질 수 있다.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 내면까지 여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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