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채가 들려주는 영국 유학 이야기

2장 계획되지 않은 도전

by 쪼꼬

Chapter 25. 오너십

잉여인력으로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서서히 나에게도 일거리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인규형이 주로 처리하던 업무부터 한인회장에게서 새로 받은 업무로 점점 업무가 확장되었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일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디테일 하면서도 난해한 한인회장의 일하는 방식 덕분에 상당히 까다로울 때가 많았지만, 한인회에서의 근무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중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오피스 활용 능력이었다. 인규형은 오피스 프로그램 환경에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 인규형을 통해서 엑셀, 워드, PPT 등 보고서 작성의 기본적 스킬을 배울 수 있었다. 기본적인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들을 활용하는데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특히 엑셀을 다룰 때는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단축키나 메뉴 사용의 빈도에 따라 작업 시간이 몇 배는 달라질 수 있다. 인규형은 엑셀을 사용하면서 마우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나 역시 많은 단축키와 ctrl키, shift키의 사용이 습관화되었다. 오피스 환경에서는 이 두 키만으로도 작업 시간의 절반 이상이 단축된다.


영국에서의 운전도 배움이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운전을 해왔었지만, 운전석의 좌우 방향이 바뀐 곳에서 거꾸로 하는 운전은 사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한인회 차량을 몰고 운전하던 날 기어를 변경하려다 오른쪽 문고리를 잡고 나갈 뻔했다. 주행 방향이 반대라서 역주행을 한 것도 여러 차례였고 그럴 때마다 런던 신사들에게 ‘F’로 시작하는 욕을 들어먹어야 했다. 하지만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나의 생활 범위는 점점 넓어졌고, 종종 친구들과 자동차 여행을 다닐 정도가 되니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한인회에서의 또 한 가지 수확은 영어였다. 킹스턴 지역의 관공서와 밀접하게 근무하면서 재영한인들의 통역을 도와주었다. 영어가 완벽히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도 영어가 편하지 않던, 특히나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에게는 도움을 드리기에 충분했다. 영국인들과의 협업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은 늘게 되었고, 이는 어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어학원에서는 여러 명의 학생 중 하나로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만을 공부하게 되지만, 업무에서 영어를 사용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 한마디가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긴장하게 되고 정확하게 의사전달을 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영어도 언어인지라 내 말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어를 잘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막연히 어학원 수업만 들어도 영어 실력이 늘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한국에서 영어 수업을 듣는 편이 낫다. 요즘엔 한국에도 원어민 선생님이 널려있지 않은가? 해외에서는 오히려 배운 영어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으면서도 중요하다.


한인음악회와 한인회장 선거를 동시에 준비하는 와중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한인음악회 장소를 대관하는 일부터 음악회에 출연할 출연진을 섭외하는 일, 그리고 브로셔 제작과 각종 장비를 사는 일까지 모두가 내 몫이었다. 동시에 한인회장 선거를 위한 선거인 명단을 만들고 선거 방법을 공유하는 일 또한 도맡아서 진행해야 했다. 인규형이 퇴사한 시점부터는 모든 일을 자의적이고 주도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인회장의 지시를 받기는 했지만, 오후 늦게나 출근하는 그가 모든 것을 챙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정이 필요한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 놓은 후 한인회장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한인회장은 굉장히 까다롭고 꼼꼼한 사람이라 그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꼼꼼해져야 했고, 그러면서도 일정 내에 일이 진행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단순히 생활비를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샌가 담당하는 업무에 몰입하고 있었다. 한인회장이 나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자 출근 시간도 오전에서 오후로 조정되었다. 사실 출근 시간이 조정되었다기보다는 근무 시간이 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인회장이 출근하는 오후부터 기약 없는 야근이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몇몇 특정한 날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야근이나 초과 근무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않았다. 챙겨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 남아서라도 야근을 할 정도로 나 자신이 이 일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샌가 나에게 오너십이 생겨버린 것이다.


오너십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스스로 체감하기 전까지는 그 영향이 어떠할지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오너십의 중요성에 있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 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 더 좋은 결과물을 낸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구나 학창 시절 한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누군가의 지시나 방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어두운 단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12년 이상 누군가 짜놓은 프로그램을 학습한다. 각각의 프로그램을 통해 얻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제시하지 않은 채 말이다. 치과의사 되기 위해는 서울대에 진학해야 하고 서울대에 진학하려면 전교 1등이 되어야 한다고 알려주지만, 돈을 많이 번다는 것 외에는 왜 치과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 이유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전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사람은 죄다 치의학과에 진학하는 듯하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내 직업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제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책상에 앉은 채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막연한 직업을 찾기 위해 펜을 굴려 가며 서로의 싸움을 부추기기만 하는 느낌이다. 당연히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자기 주도적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자신도 그러한 환경에서 십수 년을 공부했지만, 성적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나는 업무 퍼포먼스가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재미있어하는 일은 언제나 주도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억지로 일을 할 때보다 더 좋은 퍼포먼스를 낸다. 한인회에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것이 이러한 주도적 성향에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떠한 일이건 스스로 만들어내고 성공해본 사람은 그 경험의 힘으로 또 다른 성공을 끌어낼 수 있다. 오너십을 키우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올해 초 세워놓은 계획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다이어트가 될 수도 있고, 취업이 될 수도 있다. 큰 목표일 수도 있고 작은 목표일 수도 있다. 작은 목표를 이뤄내 본 사람은 더 큰 목표도 당연히 이루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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