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채가 들려주는 영국 유학 이야기

2장 계획되지 않은 도전

by 쪼꼬

Chapter 26. 절함

한인회에서의 8개월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한인회 일은 어렵지 않고 불편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천년만년 할 일도 아니었다. 2년 임기인 한인회장도 곧 바뀔 것이니 말이다. 한인회장이 바뀌어도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근무는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런던에 온 이유가 이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비자를 해결해줄 수 있을 만한 기업으로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으니 말이다.


S물산 주재원 출신의 한인회장은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한인회장이라는 직함 덕분에 대한민국 대기업 주재원들 수시로 접촉할 수 있었다. 인규형은 한인회장의 추천서로 S전자 영국법인에 입사 지원다. 이전에 한국의 S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 법인 입사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원한 후로 거의 6개월이 지나서야 입사가 가능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인규형은 현지 법인에 취업해 아직도 런던에 머물고 있으니, 어떻게 보더라도 성공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인규형이 현지법인 입사에 성공하게 되자 나 역시 기대가 생겼다. 조심스럽게 한인회장에게 현지 한국 기업의 법인장들에게 추천서를 써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흔쾌히 지원을 도와주겠노라 약속했다. 울산에 살던 당시 아버지가 H사에서 정년을 맞이하신 만큼 H사가 나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회사였다. 물론 H사가 아니더라도 국내 대기업에 현지 채용이 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한인회장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H사와 S사를 포함해 한국기업 3곳에 각각 추천서를 보냈다. 많은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규형의 케이스처럼 나에게도 불가능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규형의 조언을 받아 이력서를 적고 추천서도 직접 작성했다. 한인회장은 내가 작성한 추천서를 첨삭한 후 인장을 찍고 사인해 주었다. 후에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니, 이참에 대학원 추천서도 함께 받기로 했다. 해외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학교 추천서 1부와 학교 외 추천서 1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지 채용이 불발되면 미련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리라는 마음의 결정이 있었다.


각 주재원에게 추천서를 전달한 지 한 달가량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인회장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고, 한인회장은 전화를 넣어 주재원들에게 진행 여부를 물어봐 주었다. 저마다 검토해보겠노라 답한 후 전화를 끊었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속속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보내주신 추천서는 잘 검토해보았습니다. 해당 인력은 우리 회사에 너무도 필요한 인재이긴 하나 현재로서는 채용의 계획이 없어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해당 인력의 역량이면 한국 본사에서도 충분히 채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므로 한국 본사의 채용에 응모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확한 표현은 달랐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사실 현지 채용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지 채용을 하려면 일단 비자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학생비자를 가지고 있는 나를 그들이 무얼 보고 몇천만 원이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하려 하겠는가? 때문에 현지 채용은 대부분 현지 교민들, 주로 영주권자나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더구나 나는 이곳에서 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겨우 어학연수만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근무 경력을 가지고 있던 인규형과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한국 본사의 채용에도 충분히 합격하리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 말을 해석하면 곧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면 한국 본사에 문의하시오.'와 같은 뜻이다. 현지 채용을 하려면 한국 본사들 통해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학교나 학원이라면 단순히 한두 장의 추천서만으로도 진학이 가능할 일이지만, 직장은 입사와 동시에 비용이 들고 채용한 인력이 그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퍼포먼스를 내야 하는 곳이다. 내가 아무리 자신 있다고 한들(실제로 자신이 있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알 방법은 없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내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해버릴 있다. 해당 회사에 자리가 없었고, 한인회장의 입김이 효과적이지 못했다. 한마디로 운이 없었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실패했던 일들을 돌아보면 항상 한가지 부족한 게 있다. 바로 '간절함'이었다. 간절하게 현지 채용을 희망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원 진학이라는 탈출구도 준비해 놓았다. 간절함의 정도가 충분치 않았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다. 사실 이렇다 할 성공을 찾기가 더 힘들다. 남들이 보기엔 울산 촌놈이 대기업에 입사해 결혼하고 애도 낳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으니 성공한 거 아니냐 할 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회사에서 이렇다 할 퍼포먼스를 내지도 못했고, 빠른 승진으로 높은 연봉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해외 주재원은 아직 근처에도 못 미쳤다. 상황의 한계, 혹은 능력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바로 간절함이었다.


간절함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간절함을 스스로 극대화한 사람이야말로 목표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간절함 만으로 수학 100점을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간절함 만으로 연봉 1억을 벌 수는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시기와 우연이 필요한 일도 있다. 간절함 만으로 목표 달성을 논한다면 그건 정말 도둑놈 심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절함 그 자체만이 아니라 간절함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이다. 진심으로 간절할 때 자신의 능력이 100%, 아니 그 이상 발휘된다. '나는 간절히 원했는데 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 당신만큼의 간절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간절함이 절실함으로 바뀔 때 당신은 그 목표를 위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절실한 마음으로 다른 주재원들에게 추천서를 보냈다면, 주재원들을 일일이 만나 한 번 더 어필했다면, 대학원이라는 탈출구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취업하겠노라 마음먹었다면 아마 지금의 내 모습과는 달랐으리라.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스로 간절함이 부족했다. 적지 않은 의심도 있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다른 방법이 없고 그 길만 있었다고 하면, 혹은 그 길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었다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사했을 것이다.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나의 간절함을 절반으로 줄여놓았고, 간절함이 줄어든 나는 기도만 할 뿐 그 어떤 행동으로도 간절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생각은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게 하고 결과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유도할 뿐이다. 지나고 나서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또 다른 내일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간절함이 없어 이루지 못한 일에는 반드시 후회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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