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현지 채용은 불발되었고 대학원 입학 일정상 4월까지는 원서지원을 해야 했는데, 어느덧 시간은 2월을 향해가고 있었기에 이내 대학원 준비에 들어갔다. 바쁜 연말이 지나고 한인회에서도 여유가 생기자 인터넷으로 런던에 소재한 대학들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한인회에서 익힌 엑셀을 활용해 각 대학을 리스트업했고 운영 중인 학과, 입학금, 기숙사비, 입학 조건 등을 정리했다. 엑셀을 많이 활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노트에 적고 지우기를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된 것만으로도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각 학교의 컨디션과 위치를 확인하며 대략적 평균치가 구해졌다. 국내에서의 전공이 정치외교학이었기 때문에 관련 학과인 국제관계학이나 국제정치학과에 집중했다. 관련 학과가 아니면 추가로 시험을 봐야 할 수도 있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수업을 더 들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학교 선택의 조건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당연히 비용과 영어성적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평균 학비는 한국 돈으로 약 2,500만 원 수준이었으며, 영어점수는 IELTS 기준 최소 6.5점 이상은 되어야 어떻게든 입학이 가능했다. 정규 대학원 진학을 위한 영어성적은 기본 7.0점으로 까다로운 점수였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 국제 학생들을 위해 Pre-sessional 이라는 선입학제도를 통해서 6.5점의 점수로도 입학이 가능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학교 추천서 1부와 직장 추천서 1부가 필요한 것 또한 공통의 사항이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학교들을 제외하고 입학이 가능한 학교들을 리스트업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엉터리 학교들이 런던에도 널리고 널렸다. British Council(영국 교육부) 인증을 받은 학교 중에서도 단순히 졸업장만을 위해 존재하는 엉터리 학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추려진 학교의 리스트를 바탕으로 우선 가족들과 상의해야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대략 이 정도의 금액인데 지원이 가능할지 확인해보았다. 관점에 따라 큰돈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나였기에 이 정도 금액도 가계에 많은 부담이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의외로 흔쾌히 지원하겠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사실 대학원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에서부터 말씀드린 금액보다는 더 큰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계신 듯했다. 마침 아버지께서 정년퇴직 후 인도네시아로 근무하러 가시게 되는 바람에 여유자금이 조금 생긴 것도 한몫하게 되었다. 생활비까지 지원받게 되면 공부하기에는 편할지 모르지만, 금액적으로는 두 배 가까이 불어나기 때문에 학비만 지원받기로 하고 생활비는 스스로 해결하겠노라 약속했다.
일단 비용이 해결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자 적정한 금액 내에서 가장 좋은 학교를 선택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가장 좋은 학교를 선택하는 것, 말하자면 가장 잘된 선택을 하는 것.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의외로 대학원 진학의 목표는 확실했다. 학위취득. 무엇이 더 있겠는가? 그럼 학위취득을 하려는 목표는? 바로 취업이다. 대학원을 진학하는 사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전공이 정치외교학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한때는 NGO에 소속되어 사회 환경 개선의 원대한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진학을 고민하면서 느낀 것은 나에게 원대한 학문적 꿈이나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 차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순수한 열정만으로 NGO 활동을 하기에는 나 자신의 개인적 이기심이 전혀 없지 않았다. 조금은 더 편한 환경에서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는 사이 하고 있었다. 박사과정으로 학문을 정진하여 대학교수나 관련 전문가가 될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애초에 그렇게 지루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대학교수는 지루한 삶을 의미했다.)
목적을 확실히 정해두는 것이 결정을 쉽게 한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목적 자체를 졸업 후 취업으로 두었기 때문에 학교를 결정하는 것이 아주 수월해졌다. 첫 번째는 인지도였다. 진학이 가능한 학교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학교를 고르면 되는 것이다. 아직 한국 사회에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졸업 후 서울에 돌아와서도 느낀 거지만 영국의 우수 대학들이라 하더라도 관련분야가 아니면 대학 이름만으로는 어떤 대학인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기계공학과 우주공학으로 아주 유명한 셰필드라는 대학이 있다. 영국에서는 포항공대만큼 유명한 대학이고 이 대학을 진학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셰필드 대학을 들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영국의 대학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처럼 학교 이름만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주력 과목에 있어서 우수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련 분야 전공자를 제외하고는 그 이름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서리(Surrey)대학은 호텔경영과 기계과가 유명하고 킹스턴(Kingston)대학은 디자인이 아주 유명해서 한국의 홍익대학교와 제휴를 맺어 교환학생을 보내기도 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 대학 모두 아직 한국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낯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라도 나는 더 인지도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 전공인 정치외교학이나 국제관계학 역시 그 기원을 영국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학교가 많았다. 런던정경대(LSE)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정치/경제 대학이고, 웨일스의 카디프 대학은 국제관계학과가 시작된 학교로 평가받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 대학은 내가 진학 하기에 허들이 너무 높았고, 전공을 살려 취업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학교를 고르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취업에 당연히 더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고민의 결과였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대학이 런던대였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있지 않은 유능한 대학을 선택하는 것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만약 당신이 영국대학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런던대 출신의 남자와 워릭대 출신의 남자 중 한 명을 채용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물론 두 학교 모두 훌륭한 학교임에는 틀림없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나라면 워릭대를 채용한다.
영국의 대학 시스템은 한국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들여와 University 즉 종합대학과 College 즉 단과대학(전문대학)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영국의 대학은 이러한 종합대와 단과대의 성격이 아닌 연합대의 성격을 띤 곳이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옥스퍼드대학 또한 연합대학인데, 총 40여 개의 대학들이 모여 옥스퍼드대학교를 이루고 있다. 헤리포터의 촬영지로 유명하면서 13명의 영국 총리를 비롯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 등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많은 인재을 배출한 Christ Church College(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역시 옥스퍼드 대학의 일부이다. 옥스포드 도시에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와 같은 대학이 약 40여 개 존재하고 그중 어느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옥스퍼드 대학으로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중 어느 대학도 입학과 졸업이 쉽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