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ELTS 시험날이 다가왔다. 마치 수능시험을 준비할 때와 비슷한 심정으로 시험 전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 달 남짓의 짧은 시간 준비한 시험이었기에 더욱 자신이 없었다. 시험의 난이도를 떠나 이번 시험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게 잠에서 깨어났다. 시험장은 런던 북쪽의 골드스미스 대학이었는데,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험장에 도착할 때까지 단어장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부담감으로 인해 온몸이 떨릴 정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시험이 시작되고 모의고사를 풀듯이 문제를 풀어 내려갔다. IELTS는 절대 평가의 요소와 함께 상대 평가도 적용되기 때문에 모의고사 점수는 의미가 없었다. 주어진 시험에 최선을 다할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경험으로 미루어 시험에 긴장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시험 준비를 철저히 마쳐 완벽한 상태로 들어가거나, 혹은 전혀 준비하지 않아 긴장조차 되지 않는 상태이다.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을 치르는 내내 미치도록 긴장되고 집중할 수 없었다. 손은 또 왜 그렇게 차가웠던지... Listening 시험을 시작으로 Reading 시험이 이어지고 Reading 시험을 마친 후 곧장 Writing 시험까지 오전 시간 내내 긴장 때문에 불편했다.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시험을 마치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Speaking 시험을 기다리며 점심시간을 가졌다. 다른 시험들과는 다르게 Speaking 시험은 시험관과 1:1로 치르기 때문에 차례가 올 때까지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3~4시간까지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내 차례는 다행히 많이 늦지 않은 1시 30분이었다. 긴장도 되고 속도 좋지 않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Speaking 시험을 기다렸다. 첫 IELTS 시험에서 Speaking 시험을 망친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시험관으로 인디언 여성이 들어왔었다. 영국도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너무나도 정확한 인도식 영어를 구사하던 그녀 덕분에(?) 나는 질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Speaking 시험을 망쳐버렸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리액션도 해주지 않고 녹음기에 내 목소리만을 녹음해갔다. 내가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됐던 IELTS Speaking 시험과 너무도 달라 많이 당황했었다. 대부분 영국인 시험관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험자의 성적을 평가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번 시험점수를 낮게 받은 덕에 비자 신청이 유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다.
내 차례가 돌아와 시험장에 들어가 앉았다. 내 앞에 앉은 시험관은 이번에도 인디언 남성이었다. 순간적으로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중해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남성의 인사말이 들렸다.
"How is it going?"(안녕하세요?)
"Very well, thanks."(네,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말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발음과 억양은 완벽한 영국인이었다. 아니, 영국인 중에서도 아주 정확하고 깨끗한 발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고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던진 런던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가벼운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그의 질문이 시작됐다. 초반 주제는 주로 일상과 취미에 대한 이야기였고, 자연스럽게 점점 더 어려운 질문으로 넘어갔다. 일상적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익숙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 되지만, 어려운 질문으로 가면 어느 정도 Formal(형식적인)한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특히나 접두어를 사용하는 데 많은 연습이 되어 있다면 고급스러운 표현을 구사할 수 있지만 훈련되지 않은 채 의식적으로 생소한 접두사를 사용하려다 보면 표현이 어색해져 버리는 수가 생긴다. 내가 그랬다. 면접관의 질문에 의식적으로 사용하려던 접두사가 전체적으로 많이 어색했다. 하지만 다행히 면접관은 내 눈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며 이야기를 끊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리액션이 상당히 중요하다. 혼자 수십 또는 수백 번 연습해본 Speaking 시험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영어는 결국 언어이기 때문에 상대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과 이번 면접관의 차이는 거기에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지, 내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있는지를 상대의 리액션을 통해 확인해야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한데, 첫 면접관은 질문한 후 어떠한 리액션도 없었기에 더 말을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던 듯했다.
Speaking 시험을 끝내자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결과야 어찌 됐건 간에 시험을 마친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온 후 조금 쉬고 싶었지만, 시험 점수는 2주 후에나 알 수 있으니, 다시 마지막 남은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또다시 같은 일과의 반복이었다. 다음 시험은 3주 뒤였고 물리적, 심리적 시간이 없었다. 첫 시험 점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또다시 시작된 영어와의 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루해졌고 그만큼 집중력도 떨어졌다. 나라는 사람이 그런 건지 아니면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일에 장기간 집중해서 몰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몰입하는 데에는 적당한 동기부여와 체력, 그리고 관심이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평소의 생활습관도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평소 습관이 잡혀있으면서 성격이 차분하고 진득한 사람에게는 장기간의 집중이 수월할 수 있지만, 나처럼 항상 새로운 것 찾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일 때가 많다. 이번 영어시험 역시 오랜 시간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이 도전은 그 자체로 쉽지 않았다.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2주의 시간이 흘렀다. 첫 번째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다행히도 최소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6.5점이었다. 학부마다 조건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이미 학교로부터 통보받은 것과 같이, 인문계열 석사학위는 대부분 IELTS 7.0부터 그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솔직히 한두 달 공부로 IELTS 7.0을 받는다는 건 사실상 도둑질이다. IELTS 시험의 만점은 9.0이고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들의 평균 성적이 7.5점, 한국인들의 평균 성적은 5.8점에 불과한 정도이니 말이다. 기본 어학 실력이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7.0이라는 점수는 최소 1년은 영어 공부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거둘 수 있는 성적이다. 영국이 영어로 인해 거두어들이는 수입을 고려한다면 7.0이라는 점수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동반하고 있다. 그런 점수를 고작 한두 달 반짝 노력으로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도둑질이다. 나 스스로는 그런 도둑질을 할 기술도 없었다. 나름 언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 또한 평범한 한국인이다. 물론 6.5점이라는 점수에 살짝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길은 열렸으니 그걸로 됐다.
IELTS 6.5점을 확인하자 바로 학교에 연락을 넣었다. 일전에 문의한 Pre-sessional 코스에 대해 재차 문의했다. 기존에 메일을 보냈던 담당자는 휴가를 떠나 자리에 없었고 대신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담당자는 지금 휴가 중입니다. 2주 후 복귀할 예정이며 해당 내용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이란 나라는 이렇다. 아무리 급한 용무라 할지라도 담당자가 부재중이면 처리되지 않는다. 담당자는 아무리 급한 일을 처리하는 중이라도 정확한 일정에 본인의 휴가를 보낸다. 담당자가 부재중이라면 무한의 핑퐁 게임이 반복된다. 여기서 핑퐁 게임이란, 본인의 업무 외에는 무엇이든 다른 곳으로 연결하여 본질적 응대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에 살면서 이러한 경험이 무수히 많았다. 집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일도 거의 두 달 이상이 걸렸고, 한인회에서 음악회를 준비하며 스피커를 구매하였는데, 10월에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이 정확하게 12월 23일 날 배송되어 왔다. 그나마도 한참을 전화와 이메일로 클레임을 걸고 난 후에 말이다. 이미 비슷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던 터라 적절한 대처법을 알고 있었다. 찾아가는 것이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말은 영국에서 생겼나 보다. 정말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본인이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답변을 기다리고 해결되길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담당자의 휴가 소식을 듣게 된 다음 날 바로 학교로 찾아갔다. 본관의 Reception으로 찾아간 나는 카운터에 서서 순서를 기다린 후 안내를 받았다. 인터넷에서 Pre-sessional 코스에 대해 읽었는데 확인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학부의 입학 담당자가 휴가 중이어서 현재 확인이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는 학교 직원에게 담당 교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상사에게로 가 상황을 설명하는 듯했다. 상사로 보이는 여성은 곧 나에게로 걸어와 Pre-sessional 코스 등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담당자가 복귀하면 바로 승인 메일과 관련된 프로세스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6.5점을 확보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서 School Letter를 기다리라고 했다. 안심된 나는 입학과 관련된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 학교를 나왔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다음 시험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어 Pre-sessional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입학하면 비용을 아낄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적응이었다. 영국의 대학 시스템을 경험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대학원 수업을 접하게 되면 과연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학교 수업을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확인해봐야 했다. Pre-sessional 코스로 정식학기가 시작되기 전 미리 학교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나처럼 대학 시스템이 생소한 외국인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제도이다. 유학을 준비 중이던 친구에게도 이 코스에 대해 알아볼 것을 권하였고 친구는 내 조언을 받아들여 뉴캐슬 대학에서 Pre-sessional 코스로 시작해 대학원을 졸업했다. 후에 이 친구에게서 듣게 된 여러 가지 고맙다는 이야기 중에 Pre-sessional 코스에 대한 내용이 상당부분 있었다. 나도 친구도 만약 Pre-sessional 코스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신없이 몰아치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중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비용이 일부 추가되기는 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