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간의 Pre-sessional 과정은, 토론을 위해 글을 읽거나 과정 끝에 써야 할 에세이를 준비하는 등 꾸준히 해야 할 공부가 있었지만, 오전 9시에 시작하여 저녁 5시에 마치는 정규 수업을 포함한 모든 일정이 소화하기에 어려울 만큼 힘들게 짜여 있지는 않았다. 물론 2년 동안 영국에 살면서 편해진 영어가 과정의 난이도를 조금 낮춘 것도 사실이다. 반면 영국 생활이 처음이라 적응해야 했던 병훈이형이나 츄와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영국 생활 적응과 영어 실력 향상이라는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기에 조금은 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4주간의 과정이 끝나갈 무렵 서서히 스케쥴의 압박을 체감할 수 있었다. 우선 마지막 과제인 essay를 몰입해서 써야 했고, 작년 7월에 받아놓은 1년의 비자가 끝나는 시점이 9월이었기 때문에 비자도 연장해야 했다. essay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선생님과 함께 글의 구조를 잡아 이를 한글로 정리해보고 인용할 문구들과 내용을 모두 컴퓨터에 옮겼다. 3천 자의 분량은 다행히 MS Word에 단어를 카운팅해주는 기능으로 알수 있다. 적어도 단어를 세어가며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에세이를 쓰면서 선생님이 수없이 강조한 것은 Plagiarism 즉 표절이었다. 한국에서도 여러 유명인사의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논문 표절의 문제를 영국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경험했고, 그래서 논문을 포함한 모든 학문적 글에 인용되는 문구는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심지어 표절 여부를 검열하는 프로그램도 개발되어 있다고 했는데, 문장 혹은 문단의 단어와 문장구조 등을 분석하여 80% 이상 일치하면 표절로 판단한다고 한다. 이런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표절에 대한 의지는 꺾일 수밖에 없다. 대학 시절 출처도 밝히지 않고 마구잡이로 붙여넣기 하여 만들던 리포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Pre-sessional의 essay가 끝나고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본 과정이 바로 시작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는데, 이번에도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가 이미 시작된 오리엔테이션 내용을 들어야 했다. 오리엔테이션은 학과별로 따로 진행됐기 때문에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1년 동안 내가 함께 공부할 사람들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몇몇 동양인들이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모두 앞을 보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고 확신이 드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진행자의 설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내가 서 있던 쪽에 놓인 간식거리를 먹으러 사람들이 하나둘 뒤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무리 가운데 100% 한국인이라고 확신이 드는 한 여성이 있었다.
"저...... 혹시 한국인이세요?"
과자를 먹고 있던 여자분은 깜짝 놀라며
"어머! 한국인이세요?"
하고 되물었다.
"네네. 되게 반갑네요."
"그러니까요! 한국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거든요."
그 여자분은 대학원시절 동안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영옥이누나였는데 누나는 한국에서 제약회사에 다니던 중 업무에 대한 회의감과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싶은 마음에 유학길에 올랐다고 했다. 영국 대학원을 알아보다 유학원으로부터 퀸메리대를 소개받아 지원했고, 국제관계학과에 한국인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최근 몇 년간 한국인은 없었다고 이야기 들었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국인끼리의 만남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퀸메리대의 한국인 학생은 대부분 학부생이었고 대학원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물며 그중에서도 흔치 않은 국제관계학과라니. 한국인을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누나는 이야기했다. 높은 IELTS 성적으로 Pre-sessional을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 바로 입학한 누나는 학교에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영국 생활도 익숙하지 않았다. 반면 영국 생활의 경험과 인맥이 풍부한 나와 만났으니 당연히 서로 도움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에서는 대학원 과정을 포함한 학교생활 전반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도서관 사용법, 컴퓨터와 프린터기 사용법, 학기 중 과목(모듈이라 부른다.) 리스트, 과목별 평가 방법, 담당 교수 소개 등등. 물가가 높기로 소문난 영국인 만큼 도서관, 컴퓨터, 프린터 등 모든 인프라를 사용하는 데 인증 절차가 필요했다. 한국에서의 인증 절차보다 더 까다롭고 인터페이스도 수월하지 않아 불편했다. 게다가 인터넷은 왜 이렇게 느린지. 역시 대한민국이 IT 강국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가장 관심을 받은 것은 평가 방법과 수업 진행 방식이었다. 과목별로 시험과 essay 등 평가 방식이 상이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로지 목표는 졸업이었다.
1학기는 Core Module 즉 전공필수 과목으로 4과목이 정해져 있었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이렇게 3일간만 학교에 나가면 되는 일정이었지만 화요일은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5시까지 빼곡하게 수업이 몰려있어 쉴 틈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국제 학생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해주는 영어 수업을 점심시간에 듣기로 한 터라 더욱이 그랬다. 각 수업은 강의와 토론, 그리고 세미나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세미나는 대부분 저녁 시간에 배치되어 있기도 했고 참석이 필수사항은 아니어서 자주 참석하지는 못했다. 대신 세미나에 참석하면 담당 교수님들 외에 다른 학교 (말하자면 조금 유명한 학교의) 교수님들의 강의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다양한 네트워크도 형성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세미나를 열심히 듣는 학생은 아니었다. 생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본다.
대다수 학과의 오리엔테이션이 같은 시기에 진행되다 보니 Pre-sessional 때의 캠퍼스와는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거리는 북적이는 학생들로 가득하고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넘쳐났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로 가득한 대학 캠퍼스에 있으니 다시 대학 입학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누구나 탐내는 런던대의 학생이 된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다시 한번 열심히 공부해보겠다는 열정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 핑크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느낌에 설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