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과정이 시작되고 과목별 첫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자신의 스타일과 주요한 평가 방법 등을 공유하며 각 수업의 목표와 앞으로 공부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여 교수님의 수업은 시작부터 대단했다. 말하는 것의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로 수업을 듣는 데 지장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교수님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후에 옥스퍼드 졸업생인 진명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영국에서도 Oxfordian(옥스퍼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적 수준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일반적 영어보다 고차원적인 단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덕분에 내 머리는 시작부터 풀 가동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매번 단어의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몇 번 반복되는 단어는 즉석에서 전자사전을 통해 단어의 뜻을 확인해야 했다. 사실 여기서부터가 도전의 시작이었다.
수업 내내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정치사상 강의를 하는 교수님들의 수준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단어나 내용에 대한 습득이 되어 있어야 했다. 교수님들은 각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수업 시간에 필요한 읽기 범위를 정해 주었는데, 그중요도에 따라서 필수와 선택으로 나누어졌다. 어떤 교수님은 자신이 제안한 책의 내용을 읽지 않은 학생은 수업에 들어오지 말라고 처음부터 못 박아 이야기할 정도로 읽기는 수업의 필수 전제조건이었다. 문제는 교수님들이 제안한 읽어야 할 글들의 양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하루 평균 한 권 이상 분량의 에세이나 저널, 혹은 책을 읽어야 했는데, 필수자료만 읽는다고 하더라도 7~8시간은 읽어야 할 만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더구나 그러한 자료를 외국어로 대하는 나에게 시간은 1.5배, 아니 2배 이상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널이나 에세이의 경우는 그나마 읽을만한 내용이었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발행되는 책이니 그럴만했다. 하지만 전공도서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혹시 정치학 교과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정치외교학도이니 당연히 경험이 있다. 교과서이기 때문인지, 번역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들의 취향 때문인지 책은 단순한 문장구조나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한번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글들로 정치적 이념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두산백과)
언뜻 봐도 어렵다. 한 문장 안에 주어도 두 개 목적어도 두 개다. 이런 내용을 영어로 바꿔놓는다고 생각해보면 그 난이도는 더욱 심해진다. 영어는 문장구조 자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Beginning in the 1970s and 1980s, its advocates supported extensive economic liberalization policies such as privatization, fiscal austerity, deregulation, free trade, and reductions in government spending in order to enhance the role of the private sector in the economy.'(Wikipedia)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한번에 알아보기 어렵다. 굳이 번역해보면 내용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지지자들은 경제에서 민간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민영화, 제정긴축, 규제완화, 자유무역, 정부지출의 감소와 같은 광범위한 경제 자율화 정책을 지지했다.'
정도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단어 자체도 매우 어려울뿐더러 문장 구조 또한 단순하게 연결된 것이 아니었기에 한 문장을 독해하는데도 몇 번을 다시 읽어야 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Pre-sessional 코스에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해준 교수님의 의도가 이해되는 듯했다. Full-time 학생이라면 하루 8시간 이상은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8시간으로 충분치 않았다.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우선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플랏메이트(옆방친구)를 찾아갔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중국 출신의 한국인(조선족)이었는데, 동네에서 농구를 하다 친해진 홍콩계 영국인 데렉의 여자친구였다. 이미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던 그녀는 나에게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물론 교과서처럼 당연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녀의 이야기 중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수업/에세이/논문 등 목적에 맞는 주제를 생각하고 읽어라.
방대한 양의 읽을거리를 모두 정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읽어야 할 내용 중에는 주제와 관련 없는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읽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수업이나 글쓰기에 필요한 주제를 먼저 생각하고 각 읽을거리의 목차나 서머리(요약본)를 통해 주제에 필요한 내용을 먼저 읽는 것이 방법이다.
2. 밑줄을 긋거나 하이라이트를 쳐가며 읽어라.
많은 경우에 글을 읽다 보면 '중요한 내용이 앞에 있었구나' 하며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때때로 내가 읽었던 내용 중에 글쓰기나 논문에 인용할 내용을 찾아 책 전체를 헤매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밑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쳐 가며 읽으면 나중에 내용이 필요할 때 손쉽게 찾을 수 있다. 하이라이트 친 내용을 간단한 키워드로 노트에 정리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ㅇㅇㅇ책 28p. 신자유주의 반론" 이런 식으로 말이다. 후에 글쓰기를 위해 찾아야 하는 일이 분명히 발생할 테니 미리미리 찾아두는 습관을 갖자.
3. 독해하지 말아라. 일단 읽어라.
아직 영어로 글을 읽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무의식중에 첫 대면부터 독해부터 하려고 덤빈다. 첫 문장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피하도록 교육받아온 방식이다. 더구나 이제는 대학생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와야 한다. 영어 원서라 하더라도 우선은 쭉 읽어나가자. 한 손에는 형광펜을 들고서 말이다. 되는대로 해석하며 쭉 읽어 내려가다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라도 바로 다시 돌아와 독해하지는 말자. 체크만 해두었다가 어느 정도 내용 정리가 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 읽으면 된다. 때에 따라 정독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쭉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될 때까지 읽어라.
4. 많이 읽어라.
읽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업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많은 양을 읽어야 하고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시간은 최소 1.5배 이상 증가한다. 이에 있어서 편법은 없다. 말 그대로 물리적 시간을 내서 많이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해, 결국 1.5배의 시간적 노력을 들이면 학기 전체를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수업은 물론, 에세이를 쓸 때도 논문을 쓸 때도 든든한 자료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 과목별로 교과서로 사용되는 책이 정해져 있으니 직접적 수업 범위 정도는 정독해 주면 된다. 이에 더해서 교수님이 제안해 주시는 참고 자료들도 거의 빠짐 없이 읽기를 권한다. 수업시간 언제 어느 자료를 이야기하기 시작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학원 수업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어왔다는 전제하에서 시작되니 반드시 시간을 할애해서 많이 읽기를 권한다. 모든 것은 다 당신을 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