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채가 들려주는 영국 유학 이야기

3장 치열함이 가져다주는 것

by 쪼꼬

Chapter 39.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대학원을 미리 경험한 선배의 조언대로 시간을 내서 글을 읽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학기 시작과 동시에 하루 12시간씩 꼬박 책을 읽었다. 학교에 가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이 있었고, 등하교 시간을 고려하면 그 역시 12시간 이상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글을 읽을 틈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등하굣길 교통수단이 도서관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녹초가 되어 잠이 들기 바빴다. 수업이 없는 날은 전적으로 자료를 읽는 날이었다. 도서관에서 가져온 자료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온종일 읽었다. 아침 9시경에 일어나 저녁 9시경까지 쉬지 않고 말이다. 최대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식사하는 중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하루 12시간을 공부하다 보면 계속해서 집중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누가 시키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 집중이 되지 않을 때마다 스스로 다잡지 않으면 금세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일과를 쪼개서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각 자료의 중요도에 따라 시간을 쪼갰다. 자료의 난이도에 따라 읽기에 걸리는 시간이 천차만별이었지만, 사실 읽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분량을 기준으로 시간을 나눌 수는 없었다. 필수읽기를 오전에 배치하고 참고자료는 뒤쪽에 배치했다. 대부분 참고자료는 에세이나 저널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가 수월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양을 정했고 진도가 느려져 시간이 오래 걸릴 경우엔 제목과 첫 줄만 스캔하고 넘겼다. 아무리 중요한 자료라 하더라도 그 자료 때문에 다른 읽을거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읽어야 할 분량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지만 매 시간 5분씩은 꼭 쉬어주었다. 쉬지 않고 2시간 이상을 읽을 때는 집중력이 흐려져 시간만 더 지연됐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50분 수업 후 10분 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 한 달은 정말 읽는 것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을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항상 남아있는 분량이 부담되어 마음은 늘 조급하기만 했다. 지금까지도 시력이 1.5인 나지만 이때는 침침해지는 눈 때문에 항상 피곤했다. 피로감을 달래기 위해 남들은 커피를 마셨지만, 나는 콜라부터 시작했다. 커피숍에 일하면서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나였기에 콜라만으로도 카페인 효과가 탁월했다. 아침에 일어나 콜라 한잔과 초콜릿 하나를 먹고 자리에 앉아 읽기를 시작하면 그런대로 서너 시간은 앉아있을 만했다. 최대한 시간을 쪼개야 했기 때문에 잠시 밥을 먹는 시간조차도 아까웠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그렇게 앉아서 12시간씩 책을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읽는 속도는 빨라졌다.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기보다 발췌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학술자료의 좋은 점은 앞쪽에 Summary(요약)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약 페이지만 읽어도 본문이 어떤 내용일지 대략 감이 왔다.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팁은, 요약페이지에서 설명된 순서대로 본문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A-B-C-D인 요약본의 본문이 A-C-D-B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고로, 요약에서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았다면 본문에서도 그 페이지를 찾아내기가 수월했다. 찾아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내용 중 한두 구절에는 노란색 형광펜이 칠해지기 마련이었다.


형광펜으로 표시가 된 부분에는 인덱스 포스트잇을 붙여 언제든 찾기 쉽게 만들었다. 나중에 에세이나 논문을 쓸 때 필요한 경우도 있었고, 수업 중에 필요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이라기보다는 유용한) 표현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했고, 덕분에 보관하는 자료의 양은 날마다 늘어갔다. 영국에서 표절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를 인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처럼 자료 정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교수님들은 수없이 표절(Plagiarism)에 대해 주의할 것을 강조했다. 논문이건 에세이건 공식적으로 제출하는 모든 자료에서 6개 이상의 단어 배열이 같을 경우 그 문장은 표절로 간주한다. 물론 동일한 6개의 단어 배열만을 찾는 것은 아니다. 전체 분량 중 20% 이상이 특정 자료를 그대로 인용할 경우에도 표절로 간주한다. 사실 작정하고 Cntrl+C(복사), Cntrl+V(붙여넣기)를 하지 않는 이상 힘들 것 같아 보이지만 주요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출처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표절로 판정되면 자신이 취득한 학위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계에서 저자의 모든 학술자료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그 논문을 지도하고 도움을 준 모든 사람에게도 불명예로 기록되니 모두가 그토록 표절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강조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착실하게 찾은 자료를 논문에 인용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되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에서 리포트를 쓰듯이 시간에 쫓겨 알 수 없는 출처의 글을 마구잡이로 옮겨 적는 실수만 범하지 않는다면 표절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하던 한국에서의 대학 시절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다. 공부도 전략이기 때문에 어떤 과정을 어떤 목적으로 공부하느냐에 따라 그 전략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공부에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한 전략적 방법이나, 논문을 잘 쓰기 위한 전략적 글쓰기 방법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 노력이 필요하다. 스킬은 결국 스스로 몸에 익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몸에 익히기 위해서 수십 번, 수백 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반복해야 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방법을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그 스킬을 익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필요한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그 시간만큼 따로 떼어서 투자해야 한다. 결국 자신이 투자하는 만큼 스킬이 늘어나고 그 스킬로 목표를 이루게 된다. 공부도 일도 마찬가지이다.


잠시 회사에서의 일을 이야기해보자. 회사에 들어와 처음 몇 년 동안 새내기로 있으면서, 나는 나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자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노력에 회의가 느껴졌다. 그런데 몇 년 후, 내가 후배를 받게 되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많은 후배 역시 하나 같이 새내기의 어수룩함을 보였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나도 그들도 회사생활이라는 스킬이 몸에 배지 않았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그게 곧 경력이 된다.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이나 회사생활의 스킬이 몸에 배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공부할 때와의 차이가 있다면, 회사에서는 강제로 8시간씩 시간을 투자하게 하지만, 공부할 때는 내가 스스로 시간을 정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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