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가 시작된 후 주말마다 일하던 커피숍으로 매주 같은 시간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한국인으로 보였던 그 여인은 항상 같은 커피를 마셨다. 커피숍에서는 평소 단골 관리를 위해 고객과 종종 대화를 나누도록 권하고 있어서 나 역시도 스스럼없이 고객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 몇 주째 그녀가 계속해서 찾아오자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항상 영어로만 주문을 받았는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니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는 영국에서 한국인이냐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유창한 영어 실력 때문이 아니다. 거무튀튀한 외모 덕분에 항상 베트남이나 태국, 혹은 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인이냐고 물어볼 뿐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녀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호구조사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그녀의 직업을 묻게 되었다. 그녀는 두어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는데,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동화책을 그리는 작가이면서 미술관 가이드를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가이드라는 말에 관심이 끌렸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니 가이드라는 직업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나 역시 가이드를 해보고 싶었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반기면서 원한다면 자신이 일하는 곳을 소개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단번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마침 생활비가 모자랐던 터라 더 반가웠다.
그녀의 소개로 받은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대학원을 다니는 28살 학생이고 영국에 4년 정도 있었고 가이드를 꼭 해보고 싶다고 적었다. 며칠이 지나자 한번 만나서 인터뷰를 하자는 답변이 왔다. 날짜와 시간을 정해 담당자를 만났다. 인터뷰에 나온 분은 유럽에서 꽤 유명한 가이드 회사의 영국지점장이었는데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누나였다. 사실 지점장이라고는 하지만 직원은 자신을 포함해 고작 서너 명밖에 없었고, 인터뷰라고 해서 면접을 본다기보다는 그냥 차나 한잔하며 나에 대해 파악하는 자리였다. 면접이라 할 것도 없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 친해져 버렸고, 나는 곧이어 가이드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우선은 실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참관을 하고 그 후에 본격적으로 일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담당하게 될지역은 런던 시내 투어와 옥스퍼드였다. 사람이 당장 필요한 곳이 옥스퍼드였던 터라 바로 옥스퍼드 여행에 나섰다. 옥스퍼드로 가는 방법 중에는 Victoria역에서 버스(Mega Bus)를 이용하는 방법과 런던 패딩턴역에서 옥스퍼드역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었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패딩턴 역에서 나에게 가이드 실습을 시켜줄 여자분을 만났는데, 정말 믿을 수 없었던 것은 한국에서 내가 졸업한 대학의 경영학과 선배님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이라는 곳에서 대한민국 지방대학 동문을 직장 상사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동향이었던 덕분에 우리 둘은 더 빨리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무래도 외로웠을 테니 반가운 한국인, 그중에서도 같은 고향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았다.
옥스퍼드는 일전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긴 했지만, 가이드를 따라가는 건 처음이었으니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확실히 느낀 점은, 가이드를 동반한 투어와 그렇지 않은 개인 여행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진정으로 그러했다. 해리 포터 촬영지로 유명한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에서만 하더라도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숨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국에 살면서 그동안 무엇을 본 건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알지 못했던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옥스퍼드 투어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있었는데, 오전에는 옥스퍼드 시내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관광객들의 선택에 따라 명품 아울렛 매장인 비스터 빌리지(Bicester Village)에서 명품 쇼핑을 하거나, 처칠 생가인 블레넘 팔라스(Blenheim Palace)를 구경할 수도 있다. 각자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블레넘 팔라스를 추천한다.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배경을 가진 이곳으로 사람들을 안내했을 때, 단 한 명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다음날은 시내투어를 견학했다. 시내투어는 루트가 상당히 다양했는데, 이번 견학은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시작하여 버스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지나 템스강 건너편에서 국회의사당을 바라본 후 도보로 화이트홀을 거쳐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오전 코스였다. 버킹엄 궁전으로 가는 길에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있는데,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이 공원을 사랑한다. 이 공원은 전형적인 영국식 정원의 걸작이다.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의 차이는 아주 간단한데, 영국식 정원은 나무나 식물, 그리고 연못까지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꾸미지만, 프랑스식 정원은 나무나 식물을 자르고 깎아 정형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가위손'에 등장하는 정원사는 바로 프랑스식 정원의 정원사라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공원을 가로질러 버킹엄 궁전에 도착하면 곧이어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고, 그 후 소호나 차이나타운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후 코스는 두세 가지로 나뉘는데, 그날 날씨나 상황에 따라 코벤트 가든과 세인트폴 성당을 둘러보고 런던타워로 가거나, 기차를 타고 그리니치로 향해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 후 런던타워로 가는 루트가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그리니치로 이동해 런던 전체를 둘러보고, 날이 흐리거나 이동이 조금 느린 날에는 조금 여유롭게 코벤트 가든과 세인트 폴 성당을 구경하면 된다. 항상 마지막은 런던타워와 타워브리지에서 헨리 8세와 블러드 메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무리된다. 아마 런던에 관한 수많은 이야깃거리 중에 가장 상징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런던 시내 투어 또한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런던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나에게도 런던에 숨겨져 있는 소소한 볼거리와 이야기, 그리고 런던 타워를 배경으로 한 치정의 역사까지, 그 배경이 된 곳에서 듣는 이야기는 무엇하나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도 말이다. 그에 더해 대영박물관과 내셔널갤러리만으로도 하루 일정이 되는 박물관 투어는 진심으로 추천하는 코스이다. 그동안 내가 본 해바라기는 단순히 유명한 한 점의 그림에 불과했지만, 가이드 투어 후에 나에게 해바라기는 지친 일상에 대한 보상, 묵상을 위한 매게, 천재 화가의 놀랍고도 슬픈 업적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마치 무언가에 인도되듯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러 다녔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빠짐없이 해바라기를 보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이미 나에게 런던은 매력 그 자체였지만, 가이드의 설명으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런던은 나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가이드 투어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앞서 말한 듯이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가이드 투어 실습이 끝나고 옥스퍼드 투어부터 일을 시작했다. 일대 다수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행복 그 자체였다. 아니, 오히려 나 스스로가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가이드 투어가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말이다. 나의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 역시 나의 경험에 동의하는 것. 아마 내가 추천한 맛집을 누군가가 인정해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만족도는 그보다 훨씬 크지만 말이다. 나 자신에게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관광객들도 만족해했다. 사람들에게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진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가이드로 활동하면서 벌이는 넉넉해졌지만, 한편으로 공부에는 다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의 고정적으로 일주일에 3일 스케줄이 잡혀있던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 가이드 일을 했다. 학교 수업은 3일에서 2일로 줄어들었지만, 일자리가 하나 더 늘었기 때문에 나머지 날에는 첫 학기와 마찬가지로 하루 8시간 이상 공부를 해야만 했다. 가이드 투어를 하는 날에도 오가는 길에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어느 정도 요령이 붙었다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읽어야 하는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꾸준함이었는데, 사실 학기 후반으로 갈수록 집중력은 떨어졌고 읽어야 하는 교제를 다 읽지 못하고 수업에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가이드라는 천직을 만난듯했지만 그만큼 공부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학기 말에 한 과목의 시험이 불합격되어 재시험을 봐야 했다. 재시험에서도 불합격하면 모듈 이수가 되지 않고 학교를 다시 다녀야 했지만, 다행히 재시험에는 합격해 논문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