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채가 들려주는 영국 유학 이야기

3장 치열함이 가져다주는 것

by 쪼꼬

Chapter 48.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일

끝내 가방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어제의 일이 꿈이었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것은 냉혹한 현실. 아무도 내게 어제의 일이 꿈이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제 뒤처리를 해야 할 때이다. 인터넷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검색하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찾아봤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을 줄이야.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대로 우선 신분증부터 새로 발급 받고 난 후 학교로 가서 논문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논문이 가장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모아두었던 자료를 모두 잃어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논문을 이어나가기가 사실상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대사관에 가서 여권을 재발급하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 했다. 접수에서부터 막혔다.

"학생증이나 한국 신분증 있으세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나임을 증명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 순간 신원 미확인자가 된 것이다. 여권을 포함해 사진이 들어간 모든 신분증을 도난 당한 지금, 내가 제시하는 어떠한 서류도 그게 나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다소 과할 수 있지만 다시 한번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잘 생각해보자. 한국에서는 나를 나라고 입증할만한 것들이 다소 존재한다. 나를 아는 부모님도 있고, 주민등록증을 만들면서 찍은 사진과 지문이 데이터로 남아 있다. 하다못해 학교 졸업앨범으로도 나라는 사람이 증명될 수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러한 자료 중 어느 것 하나도 구할 수가 없다. 유일하게 나를 나로 인정하는 문서는 여권이었고, 그 여권으로 학생증과 운전면허증 등 사진이 있는 신분증을 만들었다. 그런데 사진이 들어간 모든 신분증이 없어졌으니, 무얼 보고 나를 나라고 인정한단 말인가? 심지어 이곳은 공인인증서도 없고 주민번호 뒷자리도 사용하지 않으니 말이다.


신분증이 없다고 하자 대사관 직원은 Police Report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어제 작성한 그것이다. 어제 그 서류를 작성할 때만 하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서류라고 생각해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이후에도 이 보고서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사관에서는 이 리포트와 함께 사진 두 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은행 카드도 도난 당했으니 돈을 뽑을 수도 없었고 결제를 할 수도 없어 사진관을 앞에 두고도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신분증이 없으니 은행카드를 재발급 받을 수 없을 테고, 돈이 없으면 신분증을 만들 수 없으니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대사관을 나와야 했다.

다행히 다음 날의 런던 시내 투어를 의뢰 받았다. 가방을 잃어버릴 때 함께 있던 선배가 미안한 마음에 나에게 자신의 의뢰를 양보한 것이다. 투어가 있는 날이면 투어 당일 현금으로 페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당장 급한 돈은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현금이 생기면 사진을 찍고 여권을 재발급 받을 계획이었다. 아직 여권도 비자도 논문도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그저 웃으며 그들을 인도해야 했다. 평소만큼 즐거운 에너지가 나오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날따라 관광객들의 질문은 왜 또 그리도 많던지. 책이나 하나 던져주고 자습을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프로니까 그럴 수는 없지! 그런데 그리니치 투어를 마치고 타워브리지로 향하는 길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대사관 직원이었다.

"조차행씨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우편이 왔는데 여권이네요. 언제 찾으러 오시겠어요?"

그렇다. 내 가방을 훔쳐간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여권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사실 한국인 여권으로 많은 나라를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다 보니 한국 여권은 위조나 변조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여권이 돌아왔고 나에게 닥친 문제 중 많은 부분은 해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말이다. 도둑놈에게 감사할 일이 있을 줄이야. 신분증이 다시 생겼으니, 이제야 내가 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학생증이나 신용카드를 포함해 나머지 것들은 모두 다시 발급 받으면 그만이다.


여권을 찾았으니 이제 논문을 해결할 차례이다. 학교에 가서 슈퍼바이저를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슈퍼바이저는 나에게 행정실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하며 아마도 논문 제출 기한이 연장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가 말한 대로 행정실로 찾아가 직원에게 다시 상황을 설명하자 Police Report를 요구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놓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여전히 꼬깃꼬깃 구겨져 있는 Police Report를 꺼내어 보여주자 Report Number를 확인하고는 e-mail로 문서의 스캔본과 이 번호를 적어서 논문 제출기한 연기 신청을 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 그녀가 안내해준 대로 메일을 보냈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연기 신청에 대한 확인 메일이 도착했다. 범죄와 관련된 정황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논문 제출 기한을 2달 연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가방을 도난당한 덕에 다시 찾아야 할 자료도 많아졌지만 논문을 작성할 시간도 늘어났으니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방에 노트북이 들어있지 않았던 천만다행이라며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주 감~~~사합니다, 도둑님!"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별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권을 다시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들 수는 있다.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분노와 원망이라는 감정으로 세상이 아주 짜증스럽게 보이는 시간을 잠시 거치긴 할 테지만. 이 사건을 생각하면 최근 지인이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일은 나를 강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 이러한 일로 내가 죽는 건 아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일은 겪으면 겪을수록 나를 강하게 한다. 경험을 통해 사람은 강해진다는 뜻이다. 덕분에 웬만한 일들은 스스로 방법을 찾고 처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심각해 보이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해결이 되기 마련이고,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도 풀 수 있다. 처한 상황을 걱정하고 비탄해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물론 당황하고 두려워서 화가 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니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추스르는 시간은 필요하지만 일단 지나간 일이라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는 말처럼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