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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4.

기다리는 일이 그렇게나 무서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월요일까지 앞으로 3일간 무얼 하며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민박집에서 숙식을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하루 20파운드라는 비용은 적지 않았고,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돈을 팍팍 써 가며 한가하게 여행을 즐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월요일이 올 때까지는 무일푼으로 버티기로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에 올라가 다시 잠을 청했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시차로 인해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시간은 이미 오전 11시를 넘기고 있었고, 아침은 의도치 않게 걸렀다.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쭈뼛쭈뼛 거실로 내려가 켜져 있는 TV를 봤다. TV에는 한국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런던까지 12시간을 날아왔는데, 여기서 한국 방송이라니... 출장 온 손님들을 위해 한국 방송을 볼 수 있도록 설치했다고 한다. 세상 참 좋아졌다.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TV를 보며 식사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민박집에서 제공해 준 점심을 먹으며 주인아주머니에게 근방에 가볼 만한 데를 물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킹스턴이라는 곳을 알려주셨는데,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거리라고 하셨다. 킹스턴은 템스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한국의 디자인 학도들에게 잘 알려진 킹스턴 대학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물론 돈을 아예 쓰지 않을 예정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인라인스케이트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져왔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아주 유용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른 점심을 먹은 나는 가방에 인라인을 달고 길을 나섰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미리 확인한 방향으로 걸어가다 적당한 위치에서 벤치에 앉아 인라인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이정표를 따라, 길을 물어가며 킹스턴이라는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길을 물어보는 것 역시 도전이었다. 모두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길을 묻는 것 정도는 수없이 듣고 대답해 보았을 것이다.

"Excuse me, how can I get to..."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골백번은 들었을 표현이다. 길을 찾는 대표적 표현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듣기 평가에서는

"Oh, you can go straight and turn left. You can find it on your left side."

라고 배웠을지 모른다. 현실을 알려주겠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어 일상생활을 생각해 보자.

"저... 우체국 가려면 어디로 가요?"

라고 물으면,

"직진하셔서요,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왼편에 있어요."

라는 대답이 바로 나올 확률은 우체국 직원이라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 말이 길어진다.

"우체국이요? 어... 우체국이 어디 있더라... 아! 저 앞에 회현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외환은행 보이거든요. 거기서 조금만 내려가시면 보이실 거예요."

예를 든 것이다. 위 표현과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회현사거리와 외환은행이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두 단어만으로도 얼마든지 외국인들을 멘붕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초행길에서 그곳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대답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수다쟁이의 나라 런던이었다. 킹스턴을 찾아가는 동안 서너 번의 길을 물어봤는데, 대부분 교과서에서 배운 대답이 아닌 자신들만의 대답이었고, 너무도 친절하게 필요 이상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나의 영어 듣기 실력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킹스턴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킹스턴이요! *&^%$#  @#$%^&*  _*&^%$#  ^^"

진심으로 이렇게 들렸다. 처음 듣는 그들의 악센트 때문인지 그들이 킹스턴을 알려주리라는 것 외에는 대부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두어 번 이러고 나니 긴장감이 생겼다. 이번엔 길을 잘 알 것 같은 노신사에게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노신사라면 말이 빠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영국인들의 설명 방식을 살짝 경험했기 때문에 마음먹고 제대로 들어보자고 다짐했다.

"킹스턴 가려면 어떻게 가나요?"

당시 내 모습은 인라인을 신고 있었는데, 노신사는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옆에 있던 벤치에 잠시 앉으라고 했고 그 시간부터 노신사의 마을 투어가 시작됐다. 노신사는 흡사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의 억양으로 인간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식 영어를 제대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잠깐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차이점을 짚어보자. 우리가 한국에서 흔히 듣는 영어는 대부분 미국식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은 모두 미국식 발음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듣기 평가가 100% 미국식 영어였는데, 그 후로 토익 시험에도 미국식과 영국식, 캐나다식, 호주식 발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내가 느낀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R'의 발음이다. 'really'의 발음은 영국식과 미국식 모두 'R'의 발음이 'ㄹ' 발음으로 똑같다. 하지만 'R'이 받침으로 올 경우는 달라진다. 'important'라는 단어는 미국식 발음으로 하면 '임폴턴트'가 되지만 영국식으로 발음하면 '임포-턴트'가 된다. 'matter'라는 발음은 미국식으로 하면 'R'발음이 굉장히 부각되면서 가운데 'tt’의 발음이 없어져 '메럴'이 되지만 영국식으로는 'R'발음이 없어지면서 가운데 'tt'가 남아 '메터-'가 된다. 런던 2존을 중심으로 사용되는 코크니라 불리는 사투리에는 이마저도 발음이 다르다. 메터에서 ‘tt’인 'ㅌ'이 사라지며 ‘멧어’가 된다. 처음 코크니를 접할 때는 이게 정말 영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고 알아듣지 못했다. 요컨대 영국식 영어에서 'R'이 받침으로 오면 'ㄹ'발음이 나지 않고 대신 길게(-) 발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에 어학원에서 설명 듣기로는 미국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후 그들의 후손들에게 언어를 가르쳤는데, 발음 때문인지 철자에 'R'을 자꾸 빼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 후로 미국식 발음에 'R'이 살아난 것 같다.     

영국식 영어에 적응할 새도 없이 '반지의 제왕'을 맞닥뜨린 나는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노신사의 말을 경청했는데 내가 알아들은 바로는 이러한 설명이었다.

"이 밑으로 쭉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에는 세인스버리라는 슈퍼마켓이 있어. 세인스버리는 샌드위치가 맛있고 신선한 야채를 가끔 싸게 팔아서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인데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넌 그 반대편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학교가 하나 나와. 그 학교는 킹스턴 중학교인데 초등학교랑 같이 있지. 그 학교는 역사가 깊은 학교인데 수학이랑 체육이 유명하다고 하더라고. 어린아이들이 많으니까 너무 빨리 가지 않게 조심해. 그 길로 계속 가다 보면 파란색 지붕이 있는 집이 보일 텐데 그 집에는 사과나무가 어쩌고 저쩌고."

최선을 다해 알아들으려 노력했지만 사실 이마저도 내 나름의 상상이 포함되어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그는 아주 밝은 톤으로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려고 하자 서둘러 땡큐를 연발하며 자리를 일어났다.     

노신사의 이야기에서 건질 것은 삼거리에서 왼쪽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이정표에 의지해서 킹스턴에 찾아가야만 했다. 더 길을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사실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방향은 이미 확인했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찾아가는 도중 마음에 드는 길이 나오면 아무렇게나 방향을 바꾸었다. 마을 한복판에 공원을 발견하고 잠시 앉아 한숨 돌렸는데, 그때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평온했다. 약 10분 정도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한국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평온한 마음이었다.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하던 여유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한복판이었지만 주변은 고요했고 인적이 드문 넓은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인라인을 타고 있어서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자 번화가가 나왔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맥도날드를 보며 이곳이 번화가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번화가라고는 하지만 금요일 오후임에도 그리 북적이지도 않았고, 이곳저곳 놓여있는 벤치에 앉은 사람들로 거리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인라인을 벗어 가방에 매달고 시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맥도날드였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 맥도날드에서 일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맥도날드부터 찾는 나였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많았다. 거리는 많이 북적이지 않았는데, 매장 안은 오히려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문하는 것도 살짝 두렵긴 했지만 뭐라고 이야기할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줄을 섰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주문을 받는 사람은 동양인 여자였는데 아마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였다. 명찰을 언뜻 보니 이름이 Kim으로 되어 있어 한국 사람인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었다.     

"Um... Can I have one double cheese burger, please?"(더블 치즈 버거 하나 주세요.)

마음속으로 연습한 문장 그대로 말했다.

"더블 치즈 버거 하나 드려요? 더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한국말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한국말을 들으니 매우 신기하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아 예예."

한국말이긴 했지만 상냥한 말투는 아니었고(맥도날드가 원래 좀 그렇다), 바쁜 매장이라 그런지 아주 귀찮은 듯한 말투로 대꾸를 한 그녀는 곧장 돌아서서 햄버거를 챙겨왔고, 나에게서 돈을 받아 계산을 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하는 일을 그저 응시할 따름이었다. 내가 먹고 갈지 가져갈지 묻지도 않은 채 그녀는 햄버거 하나를 포장해 잔돈과 함께 나에게 던져주듯 내밀었고 바쁘다는 듯이 "Next Please"를 외쳤다. 조금 당황한 나였지만 조용히 햄버거를 들고 매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행동은 홍콩 영화 '첨밀밀'을 연상하게 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반갑지 않은가?'

매장을 나온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망정 미소 한번 주지 않은 모습에 속이 상했다. 한국 맥도날드에서 일한 나로서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런던이다. 그녀를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하루에도 수십 또는 수백 번씩 한국인을 마주칠 수 있는 그곳에서 그녀의 행동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 사람을 보기 드문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런던이나 뉴욕과 같은 International City에서 같은 국적의 사람이라 해서 반가워하거나 호의를 베풀 일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마 우리 주위에 사는 어마어마한 수의 중국인들이 서로 마주칠 때 반가워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국 생활은 외로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고, 의도치 않게 현지 언어를 빠르게 익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햄버거를 들고 나온 나는 혼자 벤치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다시 여유를 찾았다. 도착했을 때보다는 맑아진 날씨에 기분 또한 좋아졌다. 그렇게 잠시 앉아 허기를 달랜 나는 숙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인라인을 타고 오느라 지쳤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첫 런던 버스였다. 당시 한번 버스를 타는 금액이 약 2,000원이었는데, 한국의 약 세배에 가까운 돈이었다. 하지만 이층버스를 보는 순간 금액은 중요하지 않았다. 2,000원이 아니라 20,000원이더라도 타고 싶었다. 이층버스 맨 앞자리에서 밖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대됐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어느 것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런던은 대중교통이 정말 잘 발달해 있었다. 각 버스 정류장마다 목적지별 버스 노선 안내가 나와 있었고, 버스별로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타야 하는지까지 지도와 함께 안내되어 있었다. 버스 노선이 복잡해서 행선지별로 정류장이 상이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러한 정보를 읽어내기에 무리가 있었다. 중고등학교 6년, 대학 2년 초등학교 때의 교육까지 포함하면 10년 이상 영어를 공부했지만, 찬찬히 읽으며 독해를 하던 나에게 영문 정보를 정보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아직 몇 개월은 후의 영역이었다.     

한참을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 노선 안내를 보던 나는 큰 문제를 발견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랐다. 분명 올 때는 킹스턴이라는 지역명을 듣고 찾아왔는데, 정작 내가 어디서 온 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난감했다. 지리적 조건도 전혀 모르고 심지어 어느 방향에서 온 건지도 헷갈리기 시작한 나는 그야말로 길을 잃은 아이같이 앞이 깜깜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았지만, 내 난감함을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인라인을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갈까도 고민했지만, 내가 왔던 길을 기억해 낼 자신 또한 없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당황하며 주위를 살피던 나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뛰어가 한국말로 물었다.

"저... 한국분이신가요?"

"아, 네."

"저 혹시 한국 민박집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요."

"민박집이요? 여기 한국 민박집 엄청 많은데?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 민박집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줄은 몰랐다.

"저 좀 전에 인라인 타고 한 30분 정도 왔거든요. 방향은 아마 저쪽으로 온 것 같은데..."

내 이야기를 들은 한국 분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아, 뉴몰든에서 오셨구나."

뉴몰든! 그래 그 이름이었다. 공항에서 픽업을 도와준 분이 이야기했던 지명이 얼핏 생각났다. 뉴몰든은 런던 4존에 위치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한인 동네였고, 킹스턴은 그곳에서 약 20분 거리의 런던 6존에 있었다.

"여기서 114번 버스 타고 가시면 되세요."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버스 타고 얼마나 가면 되나요?"

"아, 한 8 정거장에서 10 정거장 정도 될 건데, 안내 방송으로 뉴몰든이라고 나올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스를 기다렸다. 천만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온종일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어로 길을 물어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한국인을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인 것 같았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린 지 약 10여 분 만에 버스를 탔다. 버스 운전석은 투명한 아크릴로 막혀 있어 삭막한 느낌이었지만, 버스 기사에 대한 폭언과 폭행이 오래전부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터라 진작부터 버스 운전석이 승객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버스비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버스 운전사가 불러 세웠다. 나를 부른 것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일단 뒤를 돌아보았다. 버스 운전사가 나를 불러 뭐라고 말을 하였는데, 아크릴에 가려져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가리킨 곳에는 영수증 종이가 출력되어 있었고, 직감적으로 영수증을 가져가라는 것을 알아챘다. 영국의 교통 요금 시스템은 다소 자율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허술하다고 할까? 요금 지불하는 것에 있어서 정확하게 지키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버스를 타면 영수증을 가지고 있어야만 자신이 요금을 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중간중간 inspector(점검자)가 올라타 티켓 확인을 요청할 경우 적절한 영주승을 제시하지 못하면 벌금을 물곤 했다. 처음 런던에 도착한 당시만 해도 이 벌금이 1회 적발에 15파운드(약 3만 원)이었는데, 소문에는 한 달에 한 번만 걸린다고 가정하면 한 달 통행료를 사는 것보다 이 값이 더 싸기 때문에 통행료를 결제하지 않고 이용하는 한국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나조차도 5년 동안 inspector를 마주친 것이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이니 말이다.     

영수증을 받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꿈에도 그리던 이층 버스다. 내가 런던의 이층 버스에 올라타 있다니...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다행히 2층에는 사람이 몇 없었고, 내가 앉고 싶던 맨 앞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2층 맨 앞 좌석으로 가 앉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경관 하며, 코너를 돌 때마다 느껴지는 스릴감이 가히 인상적이었다. 요즘은 한국에도 많이 적용되고 있는 회전교차로(영어식 표현은 Round About이다)를 돌 때면 행여나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런던의 버스 운전기사들은 진정한 운전의 베테랑들이었다. 좁은 골목들과 라운드어바웃을 몇 개 지나 약 20분 정도 이동하자 방송에서 '뉴몰든 파운틴(New Malden Fountain)'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버스에서 내리자 나름 익숙한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나의 첫 도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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