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일이 그렇게나 무서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월요일까지 앞으로 3일간 무얼 하며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민박집에서 숙식을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하루 20파운드라는 비용은 적지 않았고,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돈을 팍팍 써 가며 한가하게 여행을 즐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월요일이 올 때까지는 무일푼으로 버티기로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에 올라가 다시 잠을 청했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시차로 인해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시간은 이미 오전 11시를 넘기고 있었고, 아침은 의도치 않게 걸렀다.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쭈뼛쭈뼛 거실로 내려가 켜져 있는 TV를 봤다. TV에는 한국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런던까지 12시간을 날아왔는데, 여기서 한국 방송이라니... 출장 온 손님들을 위해 한국 방송을 볼 수 있도록 설치했다고 한다. 세상 참 좋아졌다.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TV를 보며 식사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민박집에서 제공해 준 점심을 먹으며 주인아주머니에게 근방에 가볼 만한 데를 물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킹스턴이라는 곳을 알려주셨는데,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거리라고 하셨다. 킹스턴은 템스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한국의 디자인 학도들에게 잘 알려진 킹스턴 대학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물론 돈을 아예 쓰지 않을 예정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인라인스케이트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져왔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아주 유용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른 점심을 먹은 나는 가방에 인라인을 달고 길을 나섰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미리 확인한 방향으로 걸어가다 적당한 위치에서 벤치에 앉아 인라인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이정표를 따라, 길을 물어가며 킹스턴이라는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길을 물어보는 것 역시 도전이었다. 모두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길을 묻는 것 정도는 수없이 듣고 대답해 보았을 것이다.
"Excuse me, how can I get to..."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골백번은 들었을 표현이다. 길을 찾는 대표적 표현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듣기 평가에서는
"Oh, you can go straight and turn left. You can find it on your left side."
라고 배웠을지 모른다. 현실을 알려주겠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어 일상생활을 생각해 보자.
"저... 우체국 가려면 어디로 가요?"
라고 물으면,
"직진하셔서요,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왼편에 있어요."
라는 대답이 바로 나올 확률은 우체국 직원이라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 말이 길어진다.
"우체국이요? 어... 우체국이 어디 있더라... 아! 저 앞에 회현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외환은행 보이거든요. 거기서 조금만 내려가시면 보이실 거예요."
예를 든 것이다. 위 표현과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회현사거리와 외환은행이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두 단어만으로도 얼마든지 외국인들을 멘붕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초행길에서 그곳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대답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수다쟁이의 나라 런던이었다. 킹스턴을 찾아가는 동안 서너 번의 길을 물어봤는데, 대부분 교과서에서 배운 대답이 아닌 자신들만의 대답이었고, 너무도 친절하게 필요 이상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나의 영어 듣기 실력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킹스턴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킹스턴이요! *&^%$# @#$%^&* _*&^%$# ^^"
진심으로 이렇게 들렸다. 처음 듣는 그들의 악센트 때문인지 그들이 킹스턴을 알려주리라는 것 외에는 대부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두어 번 이러고 나니 긴장감이 생겼다. 이번엔 길을 잘 알 것 같은 노신사에게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노신사라면 말이 빠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영국인들의 설명 방식을 살짝 경험했기 때문에 마음먹고 제대로 들어보자고 다짐했다.
"킹스턴 가려면 어떻게 가나요?"
당시 내 모습은 인라인을 신고 있었는데, 노신사는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옆에 있던 벤치에 잠시 앉으라고 했고 그 시간부터 노신사의 마을 투어가 시작됐다. 노신사는 흡사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의 억양으로 인간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식 영어를 제대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잠깐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차이점을 짚어보자. 우리가 한국에서 흔히 듣는 영어는 대부분 미국식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은 모두 미국식 발음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듣기 평가가 100% 미국식 영어였는데, 그 후로 토익 시험에도 미국식과 영국식, 캐나다식, 호주식 발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내가 느낀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R'의 발음이다. 'really'의 발음은 영국식과 미국식 모두 'R'의 발음이 'ㄹ' 발음으로 똑같다. 하지만 'R'이 받침으로 올 경우는 달라진다. 'important'라는 단어는 미국식 발음으로 하면 '임폴턴트'가 되지만 영국식으로 발음하면 '임포-턴트'가 된다. 'matter'라는 발음은 미국식으로 하면 'R'발음이 굉장히 부각되면서 가운데 'tt’의 발음이 없어져 '메럴'이 되지만 영국식으로는 'R'발음이 없어지면서 가운데 'tt'가 남아 '메터-'가 된다. 런던 2존을 중심으로 사용되는 코크니라 불리는 사투리에는 이마저도 발음이 다르다. 메터에서 ‘tt’인 'ㅌ'이 사라지며 ‘멧어’가 된다. 처음 코크니를 접할 때는 이게 정말 영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고 알아듣지 못했다. 요컨대 영국식 영어에서 'R'이 받침으로 오면 'ㄹ'발음이 나지 않고 대신 길게(-) 발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에 어학원에서 설명 듣기로는 미국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후 그들의 후손들에게 언어를 가르쳤는데, 발음 때문인지 철자에 'R'을 자꾸 빼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 후로 미국식 발음에 'R'이 살아난 것 같다.
영국식 영어에 적응할 새도 없이 '반지의 제왕'을 맞닥뜨린 나는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노신사의 말을 경청했는데 내가 알아들은 바로는 이러한 설명이었다.
"이 밑으로 쭉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에는 세인스버리라는 슈퍼마켓이 있어. 세인스버리는 샌드위치가 맛있고 신선한 야채를 가끔 싸게 팔아서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인데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넌 그 반대편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학교가 하나 나와. 그 학교는 킹스턴 중학교인데 초등학교랑 같이 있지. 그 학교는 역사가 깊은 학교인데 수학이랑 체육이 유명하다고 하더라고. 어린아이들이 많으니까 너무 빨리 가지 않게 조심해. 그 길로 계속 가다 보면 파란색 지붕이 있는 집이 보일 텐데 그 집에는 사과나무가 어쩌고 저쩌고."
최선을 다해 알아들으려 노력했지만 사실 이마저도 내 나름의 상상이 포함되어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그는 아주 밝은 톤으로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려고 하자 서둘러 땡큐를 연발하며 자리를 일어났다.
노신사의 이야기에서 건질 것은 삼거리에서 왼쪽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이정표에 의지해서 킹스턴에 찾아가야만 했다. 더 길을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사실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방향은 이미 확인했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찾아가는 도중 마음에 드는 길이 나오면 아무렇게나 방향을 바꾸었다. 마을 한복판에 공원을 발견하고 잠시 앉아 한숨 돌렸는데, 그때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평온했다. 약 10분 정도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한국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평온한 마음이었다.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하던 여유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한복판이었지만 주변은 고요했고 인적이 드문 넓은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인라인을 타고 있어서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자 번화가가 나왔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맥도날드를 보며 이곳이 번화가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번화가라고는 하지만 금요일 오후임에도 그리 북적이지도 않았고, 이곳저곳 놓여있는 벤치에 앉은 사람들로 거리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인라인을 벗어 가방에 매달고 시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