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고 싶지 않다.
요즘 당구를 친다. 고교시절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불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그런 당구장의 낭만은 거의 사라졌다. 그 시절, 손발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부담되던 게임비는 상대적으로 ‘푼돈’ 정도로 체감되나 게임에 져서 ‘물리는’ 기분은 여전하다(물론 이겼을 때, 쾌감도 여전함). 담배 연기로 자욱하던 당구장의 풍경은 더 이상 없다. 대신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작은 흡연실이 꽤나 답답해 보일 뿐. 비흡연자로서 애연가들의 고충은 알고 싶지 않다. 울퉁불퉁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당구 테이블도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 대학가의 흔한 당구장은 10분에 300원, ‘삼백 다이’로 통했다. 이제는 테이블에 전기 코드를 꽂은 열선이 깔려있어 공도 훨씬 잘 구른다. 하지만 변함없는 구력, 그리고 친구들의 허풍. 신사스포츠로 지켜야 할 에티켓은 친구들이 모이면 단숨에 사라진다. 사랑방처럼 수다가 이어지고 서로 농을 주고받고, 아깝게 공이 비켜가면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는가 하면, 무심결에 뜬금없이 사는 얘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 이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아마도 이것이 이기는 자의 '노하우’인 듯).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소주를 한잔하면서 누리는 남자들만의 얼마 남지 않은 아지트가 바로 ‘당구장’이다(당구를 즐기는 여성들에게 미리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토요일 밤, 아는 동생을 동네에 새로 생긴 ‘찜’해놓은 당구장으로 초대했다. 최근 무르익은 당구 실력을 뽐내고 싶었다. 동네 당구장답게 주인장을 포함한 동네 주당들이 얼큰하게 취해 한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끌벅적’한 당구장 분위기. 어수선해서일까 보기 좋게 패배! 다음날 복수전을 위해 원정을 나섰다. 당구장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영업을 하지 않는 곳도 있었고, 간판만 달아놓은 곳도 허다했다. 요즘 누가 당구장을 가나? PC방이 그 자리를 대신했지. 어렵게 금호 사거리에 오래된 건물 4층에 위치한 당구장을 발견! 엘리베이터는 물론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순간 놀랐다. 동네 조기축구회 아재들이 뒤풀이로 당구장을 찾은 모양이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뽕짝’과 ‘최신가요’를 번갈아 틀어대고 서너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일일이 대화를 받아주느라 바쁜 모습이었고 한쪽 빈 테이블에 가 자리를 잡았다. 술기운이 오른 조기축구 아재들은 내기에 큰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서로 자기가 맞다 아웅다웅. 한쪽 빈 테이블에 이번엔 ‘운동복’ 차림의 고등학생들이 들어섰다. 청소년만의 패기가 느껴지는 험한 욕설이 오가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이렇게 허름한 동네 당구장이 대낮부터 만석이라니... 집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핑계로 또 보기 좋게 내기에 졌다. 승부욕이 워낙 없는 성격이라 화가 나진 않았지만, 연속해서 느끼는 패배감은 썩 좋지만은 않더라. “이제 당분간 당구 안쳐!”하고 어린이날 연휴에 떠난 강원도 정선 여행까지 가서 당구장을 찾았다. 검색을 거듭해 정선5일장 근처에 당구장을 찾아냈다. 육아에 지친 아빠, 오랜만에 당구를 치는 유부남, 미국에서 당구를 배워온 총각까지. 지금 생각해보니 꽤나 집요했다. 어렵게 찾아간 당구장에 빈 테이블은 딱하나. 아직도 당구 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시간이 흘러도 남자들의 유치한 구석은 변치 않는 듯하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 ‘밀레니얼’들은 다르겠지. <배틀그라운드>하러 PC방에 처박힐 테니. 당구장의 낭만도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그 낭만, 실컷 만끽해보련다. 그리고 좀 이겼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