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못낸 밥값은 내일 내면 되는 거지
덴마크 대학에서 일하며 주로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오지만, 가끔 깜빡하고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한 날은 학생 식당에서 먹는다. 일하다 정신없이 나가다 보면 가끔 카드를 깜빡하고 갈 때가 있다.
어느 날, 동료에게 "앗, 나 카드 깜빡했다. 내 것까지 결제해줄 수 있어?"라고 물어봤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여기 내일 와서 오늘 것까지 결제하면 돼. 다들 그렇게 해." 괜히 마음이 찔려서 직원에게 확인차 물어보니, 정말 그렇다고 했다. 오늘은 그냥 먹고, 내일 결제하면 된다고. 여기는 먹고 튀는 사람이 별로 없나 보다 싶었다. 동료에게 물었다. "나는 이런 문화가 좀 신기해. 나를 뭘 믿고 내일 와서 결제해도 되는 거야?" 동료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믿는 거지. 네가 내일 와서 돈을 낼 거라는 걸." 참 별거 아닌데 마음이 찡했다. 나를 믿어주는 그 믿음에 부응하듯, 나는 다음 날 어제 못 낸 것까지 이틀치 밥값을 결제했다.
덴마크는 소득세율이 높은 편이다. 최저 38%에서 시작해 소득에 따라 50%를 넘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무료인 것도 아니고 (공립학교는 무료지만), 에너지비용이나 렌트비용 등 기본적인 생활유지비용도 높다. 그럼에도 비싼 세금에 크게 불만을 갖지 않는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이 받는 노인 연금이 한 명당 월 200만 원 정도다.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65세부터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다. 둘째, 그들이 낸 세금이 새지 않고 잘 쓰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근거 있는 믿음이다. 실제로 덴마크의 재정 건전성은 상당한 상위권에 속한다.
어릴 때 나는 거짓말을 좀 하는 아이였다. 자잘한 거짓말들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난처한 순간을 모면하려 한다거나 하는 이유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어린 아이가 거짓말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게 참 짠하고 안타깝다. 한번은 거짓말 한 것이 들켰는데, 엄마가 진짜 경찰을 부르고 "거짓말하면 감옥 보낸다"고 한 그 이후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감사한 일이다!
덴마크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건, 이들의 정직함이 단순히 개인의 성품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전체가 서로를 믿고, 그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카드 없이도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신뢰부터, 높은 세금을 기꺼이 내는 큰 신뢰까지. 이 모든 게 서로가 서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너무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는 사회. 그런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