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마음, 네 번의 이직 그리고 나

슬기로운 직장생활1_ 나의 이직의 역사

by 해린


나는 지금까지 네 번의 이직을 했다.
원래 지루하고 따분한 것을 오래 견디지 못하는 성향이라, 한 직장에서 몇 년씩 근무하는 일은 내게 큰 도전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20대 시절, 나는 너무 이르게 자리를 잡아버렸다. 깊게 고민하기보다는 순간의 욕망에만 충실했던 것 같다. 늘 그만두고 싶었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나이가 어느덧 적지 않게 되었지만, 내 안의 욕망은 여전히 춤을 춘다.

작년에도 다시 마음이 들썩였다. 사표를 품고 꺼낼 날만 기다렸지만, 다행히도 아직 그 사표는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나는 내 직장 생활을 돌아보고 싶어졌다. 네 번의 이직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마음속으로 23살의 나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2003년, 첫 직장

2003년 9월, 나는 생애 첫 직장을 얻었다.
가족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 중증 장애인이었다. 사지마비로 혼자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몸, 단독주택 2층에 살며 외출을 하려면 누군가의 등에 업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직장 생활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과 매일 싸우다시피 하며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사회생활의 기회를 찾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장애인 단체 사람들을 통해 작은 기회들이 다가왔다. 나는 하나씩 그 기회를 붙잡으며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갔다. 그러자 결국 단체 상근 제안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 두 곳에서 제안을 받았다. 한 곳은 곧 설립될 단체, 한 곳은 이미 자리를 잡은 곳. 장단점이 뚜렷했다. 나의 최우선 목표는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었기에, 독립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나의 경험을 존중해 주고, 사회적 차별을 분명히 짚어 줄 수 있는 곳. 그래서 나는 여성 단체의 상근직을 선택했다.

하지만 매주 고정적으로 외출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겨웠다. 주 3일 출근이었지만, 그 3일은 전쟁 같았다. 다행히 단체에서 나를 위해 활동지원사를 구해 아침마다 집으로 보내 주었다. 지원사는 나를 씻기고 옷을 입힌 뒤 업어서 계단을 내려가 전동휠체어에 태웠다. 이후 나는 혼자 이동을 해야 했다.


목숨 건 출근길과 독립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1시간 반 이상 휠체어를 타고 달려야 했다. 당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역은 10% 남짓이었다. 인도는 울퉁불퉁했고, 가게 짐들이 길을 막아 도로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버스의 위협, 뒤에서 울리는 크락션 소리에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1시간 반을 달려 지하철에 오르고, 열차로 1시간을 더 가야 사무실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만 2시간 반이었다.

도착 후 내가 맡은 일은 기사 스크랩과 외부 활동이었다. 처음 몇 달은 ‘출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왕복 5시간이 걸려도 힘든 줄 몰랐다. 어쩌면 가족들이 “한 달도 못 버틸 것”이라고 한 말에 오기가 생겨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버티던 중, 상근 10개월 만에 단체 사람들의 도움으로 부모님 집을 나와 사무실 근처로 이사했다. 출근 시간이 30분으로 줄자, 직장 생활이 한결 수월해졌다. 몇 년간 큰 탈 없이 다녔지만, 배움이 부족한 탓에 회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학력의 동료들은 영어를 섞어가며 정책 용어를 쏟아냈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퇴근 후에는 강의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하자 대화에 끼일 수 있게 되었고, 업무도 늘어나며 책임도 커졌다. 사업계획서를 써 본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혼자 작성한 계획서가 공모에 선정되는 성취도 맛봤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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