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

슬기로운 직장생활2_ 나의 이직의 역사

by 해린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방 바닥 장판의 무늬조차 내게는 사람 얼굴처럼 보여 그 위에 눈, 코, 입을 그려 넣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낙서한다고 혼이 났지만, 다음 날이면 또다시 무늬 위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미술 시간은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숙제는 미루고 또 미뤘지만, 미술 숙제만큼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작했다. 그림 속에서는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었고, 현실에서 장애로 인해 하지 못한 것들을 자유롭게 해낼 수 있었다. 비록 손에 장애가 있어 정교한 스케치는 어렵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그림은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좋아하던 그림은 중학교 자퇴 이후 멈추었다. 진행되는 장애로 인해 좋아하던 수채화를 더 이상 혼자 준비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림에 대한 욕구도 포기해 버렸다. 학교를 그만둔 순간, 내 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지관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를 통해 뜻밖의 길을 발견했다. 그는 웹디자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컴퓨터로 그림을 그려 홈페이지 제작에 활용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출퇴근이 어려운 나에게 집에서 할 수 있는 직업이라니. 나는 곧장 자원봉사자에게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점점 디자인이라는 세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고, 나는 인터넷을 통해 혼자 배우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구인사이트에는 ‘○○대학교 디자인 전공자 모집’ 같은 학벌주의적 문구들만 가득했고, 그 순간 웹디자이너의 꿈은 무너졌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는 작은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단체에서 몇 년간 상근 활동을 하면서도 나는 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동료들의 응원과 배려가 아무리 넘쳐나도, 그것은 내 안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왜 저들처럼 말을 잘하지 못할까, 왜 멋진 계획서를 쓰지 못할까”라는 열등감만 쌓여갔다. 결국 나는 온갖 이유를 짜내며 퇴사의 정당성을 만들어 갔다. 아마도 나를 지지해 준 동료들을 배신한다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자기합리화였을 것이다.


20대 중반, 큰 수술을 겪으며 언제 또 죽음의 문턱에 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건 하고 죽자’는 마음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현실적으로 내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은 멈출 수 없었다. 다시 디자이너의 꿈을 붙잡으려 했지만, 장애인 직업훈련소에서는 독립생활이 불가능하면 입학이 안 되고, 통학 노선마저 맞지 않았다. 모든 계획은 무너졌다. 퇴사 선언까지 했고, 반대하던 엄마까지 겨우 설득했는데 돌아갈 길조차 없었다. 절망 속에서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사회적기업에서 디자인팀 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장애인 인턴 사업을 시작한다며 내게 응시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었다. 일정 기간 교육을 받은 뒤 실무에 투입되고, 연말 시험에 합격하면 정규직으로 채용된다는 조건이었다. ‘시험’이라는 단어가 걸리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흔쾌히 “하겠다!”고 답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디자인을 드디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꿈만 같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아직 몰랐다. 때로는 꿈이 꿈으로 남을 때 더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낙락으로 떨어질 뻔한 인생을 간신히 구해, 나는 그토록 바라던 디자인 업체에 인턴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단체에서 직급을 맡아본 내가 인턴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새로운 분야이니 감수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다. 여성들만 있던 단체와 달리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고 위계질서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팀장은 고객에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거칠게 화를 냈고, 나는 큰 목소리에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참고 견디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도 디자인을 배우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일러스트 툴을 하나둘 익히며 신기했고, 과제를 마칠 때마다 성취감이 밀려왔다. 가끔 팀장이 칭찬을 해 줄 때면 어깨가 으쓱해지며 ‘내가 천재 아닌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실력을 쌓아갔고, 본격적인 실전 업무에 투입되었다. 첫 주문을 무사히 통과시켰을 때, 속으로 “예스!”를 외치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다른 고객의 불만 전화를 받고, 팀장이 내 자리로 와서 “형편없는 디자인”이라며 화를 내던 순간 눈물이 날 뻔했지만 꾹 참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정규직 전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객이 내 디자인을 보고 “예쁘다”라고 말해 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가족 안에서 늘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던 기억 때문에, 나는 언제나 타인의 평가에 민감했다. 이전 단체에서 동료들이 무형의 장점을 아무리 말해주어도 와닿지 않았지만, 눈앞의 결과물을 두고 직접 칭찬을 들을 때 비로소 자존감이 올라갔다.


결국 인턴 과정을 마치고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러나 회사 사정이 어려워 정규직 채용이 불투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대표는 면담 자리에서 “급여는 많이 못 줘도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후에도 나는 남들보다 느린 손을 보완하기 위해 늘 야근하며 두 배의 시간을 들였다. 아무도 속도를 탓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고민하다 작업이 지연되면 팀장은 달려와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야! 고객의 입맛에 맞추는 도구야!”라고 호통쳤다. 그럴 때면 정신이 번쩍 들었고, 다시 빠르게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4년 동안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갔다.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은 곧 의무가 되었고, 동료들과의 관계마저 서서히 틀어졌다. 그때서야 알았다. ‘가족 같은 조직’이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국 나는 두 번째 퇴사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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