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진 딸과 엄마
- 나는 뇌성마비 장애인
나는 일곱 달 반 만에 태어났다. 미숙아이었지만, 딸이라서 인큐베이터에 못 들어갔다. 이미 위로 여섯 명이 딸이 있었기에 일곱 번째 딸에게 돈을 써서 살릴 만큼 부잣집도 아닐뿐더러 인정 많은 집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죽을 수 있게 방치할 모진 사람들도 아니라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극진하게 보살폈다고 한다. 작고 작기만 했던 내가 서서히 자라났지만, '보통의 생애'와 다르게 성장되고 있음을 깨달은 엄마는 나를 안고 병원에 갔었다. 여러 검사 끝에 진단명이 내려졌다. 그 진단으로 나는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엄마와 함께 장애를 낫기 위해 전국을 누비며 온갖 치료사를 만났던 기억밖에 없다. 어릴 적에 나는 현재 장애 상태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돌이 지나도록 스스로 목조차 못 가누며 앉지도, 서지도 못 한 채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사람'으로 만들고자 사방을 다 뛰어다니셨다. 딸 일곱에 장애를 가진 딸까지 낳았으니 아마도 엄마 입장에서는 절망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나를 ‘정상’적인 아이로 만드는 것이 당신의 큰 인생 목표로 삼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이 인생 목표로 어느 장애아 부모보다 더 절박하고 절실하게 나의 장애를 낫게 해 주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셨던 것 같다.
- 나의 장애가 없어질 수만 있다면
초등학교를 다닐 때가 가장 절정에 오른 치료받는 시기였다. 엄마는 우리 동네 근처에 특수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고, 그 학교에서 물리치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나를 입학시켰다. 특수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학업보다 본격적으로 치료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아마도 엄마는 특수학교에 다니는 장애 아이들을 보며 두려움이 느끼셨던 것 같았다. 아무 움직임 없이 두 눈만 껌뻑거리는 아이, 말을 시켜도 아무 반응을 안 보이는 아이... 등 평소에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장애유형의 장애 아이들을 보며 나도 저 장애 아이들 그룹에 속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이 그룹에 속해 벗어 나오지 못할까 봐 엄마는 전전긍긍하며 나를 더 혹독하게 치료를 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성인이 돼서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때였다. 운동 차원에서 엄마와 손잡고 불안정한 걸음으로 함께 동네 산책이라도 하면 사람들의 쑥덕거림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저런 애를 데리고 밖에 나오다니, 용감하네요’ ‘따님이 어쩌다 이리된 거예요?’ ‘말귀는 알아들어요?’ ‘말은 할 줄 알아요?’ 이런 질문들은 어딜 가도 받았다. 어쩌다 택시라도 타는 날이면 10대 중에 8대는 승차 거부를 하고 가버렸다. 마치 차별을 품은 장대비가 우리를 향해서만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나와 같이 차별과 모욕의 비를 흠뻑 맞으며 결심했으리라. ‘기필코 이 치욕스러움에서 빠져나오게 해 줄게’
그 당시 엄마는 차별을 가하는 사회 탓이 아니라 걷지 못했던 나와 그런 나를 낳은 엄마의 잘못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나의 치료에 모든 걸 내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나의 아침은 척추 교정받는 치료로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에 척추 교정 치료사가 우리 집으로 출근해서 잠을 자고 있는 나를 기계에 눕혀 놓고 우두득우두득 뼈를 맞추고 내가 기절하기 직전에 치료를 끝내고 갔다. 그것도 일주일 3번씩. 그러면 나는 울면서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학교에 가셔야 비로소 편안함을 찾게 된다. 평안함도 잠시뿐, 수업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학교 안에 있는 물리치료실로 가서 다시 고통받는 몸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뇌병변 장애로 굳어진 근육을 펴고, 힘이 없는 다리로 억지로 서 있으며 못하면 맞기도 했다. 치료 내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개인 물리치료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받았던 물리치료와 똑같은 수위의 치료를 받아야만 나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이 일과 말고도 가끔 용하다고 소문난 치료사 혹은 무당 집이라도 있으면 전국을 안 가리고 갔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의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그저 10원 한 장이라도 아끼고 아껴서 나한테 쏟아부은 것이다. 엄마는 짠순이었다. 식재료를 살 때도 싼 곳들만 골라서 머리 위에 짐을 이고 등에 메며 장을 보았고, 속옷이 낡아서 더 이상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까지 입어야 버리셨다. 그렇게 악착같이 아낀 돈을 엄마는 나의 장애를 고치는 일에는 과감하게 돈을 썼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치료 과정이 지옥이었고, 불행이었다. 아무리 나를 위한 것이라지만, 어린 나에게 설명되지 못했다. 왜 나만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 언니들은 고통스러운 훈련 없이도 편하게 걷고 뛰어다니는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견디며 참아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 몸은 나쁘고 고쳐져야 하며 내 몸에 달라붙은 장애를 떼어내야 한다는 강박적인 사고만 강해질 뿐이었다. 비장애 형제들 틈에서 나는 늘 혼자였고, 외로웠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유년시절을 장애를 치료하는데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엄마는 나의 장애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모든 치료를 중단시켰다. 호전되었던 장애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장애가 더 심해지자 엄마는 치료를 중단했고, 나에 대한 모든 기대도 놓으셨다. 더 이상 학교도 보내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내가 ‘정상적인 삶’의 괘도 진입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치료가 중단되자 그때서야 내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가족이나 치료사들이 포기했던 나의 몸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정말 없는 것인가? 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포기했던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해졌다. 그냥 가족이 주는 밥이나 먹고 티브이만 보며 살다가 아무도 찾지 않을 장애인 수용 시설에 맡겨질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이곳에서, 온몸이 굳어져 겨우 손가락 하나만 사용할 수 이 몸으로 무언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