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프린지페스티벌 자원봉사자인 인디스트 활동을 처음 하며 놀랐던 것은 인디스트가 못 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인디스트 활동에는 크게 하우스 업무와 티켓 업무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있다.
인디스트는 “관객”을 하기도 한다.
공연 시작이 임박했으나 관객이 없는 경우... 극장에 배우가 관객보다 많은 경우... 기획자로서 끔찍한 상황이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때 혜성처럼 나타나 공간을 빛내주는 사람들이 인디스트-관객이다.
나는 인디스트 활동 중에 “관객” 역할도 포함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관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은 공연을 보는 사람이다. 준비된 객석에 앉아 무대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러나 기침 소리를 내거나 바스락 소리를 내거나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고 핸드폰을 봐서도 안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연에 관한 의미를 해석하고 결정하는 일을 한다. 해도 되는 것, 하면 안 되는 것을 떠올리면 관객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관객에 관해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관객은 관찰하고 선별하고 비교하고 해석한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그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종류의 장소에서 보았던 많은 것들과 연결한다. 관객은 자기 앞에 있는 시의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시를 짓는다. 관객은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이다.
랑시에르는 관객의 능동성과 해석자적 측면을 강조하며 관객이 주체성을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 그 자체로서 연극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객이 대단하다는 것을 랑시에르의 입을 빌려 말해본다.
프린지페스티벌은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응원하는 축제다. 그런데 프린지에서 “관객하기”란 특히 어려운 일이다. 프린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 “실험적”이라는 말은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고 두 번째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 “관객참여형”이라는 말은 관객이 의자에 앉아 가만히 멍 때리게 두지 않고 배우가 불편할 만큼 가까이 다가오거나 말을 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불편함과 어색함을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사람도 결국 관객이다. 특히 프린지에서 관객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능숙함, 어색함, 거친 것, 부드러운 것을 모두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물론 다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를 경험하며 관객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조금씩 발견해 간다. 이게 바로 예술 애호가의 마음 아닐까. 관객의 예술 취향도 한순간에 생기지 않는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을 즐길 수도 있고 기존의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형식적 실험을 경험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예술가가 언어를 실험하는 자리인 만큼, 관객에게도 프린지는 취향을 탐구하고 감각을 넓히는 실험의 장이다.
결국 프린지 인디스트의 ‘관객하기’는 단순히 객석에 앉아 있는 일만은 아니다. 인디스트가 공간을 채우는 관객이 되듯, 모든 관객은 예술가의 실험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다.
관객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 보니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무대 위의 시도가 관객의 응답 없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