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자친구 사절
영은이는 넷째 딸이다. 위로 언니 셋이 있다.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영은이의 세계는 아빠 외에는 여성의 세계이다.
영은이가 본 아빠는 그리 멋있지는 않았다.
젊어서 웃통 벗고 찍은 우락부락한 근육의 아빠는 조금 멋있기는 했다.
가죽점퍼를 입은 잘생긴 젊은 아빠는 자주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재미있고 익살맞고 장난기도 많지만, 갑자기 화도 잘 내는 아빠였다.
영은이는 언젠가부터 오빠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동네 오빠나 어린 남자아이와 놀기도 했지만,
한 오빠의 배 위에 올라타는 등 험하게 놀다가
엄마한테 혼이 난 이후엔 여자아이들과만 놀았다.
"가시나가 어데 그래 막 놀고 있노?"
영은이는 자신이 뭘 잘못한 줄도 몰랐다.
단지 오빠의 배가 불룩 나와서 푹신하고 좋았는데 말이다.
어느 날 집에 가려는데 교실 앞에서 재억이가 수첩을 하나 주었다.
"영은아, 이거 할 끼가?"
"어어, 이게 뭔데 그라노?"
"니 줄라꼬 갖고 왔따."
그러고는 재억이는 단거리 선수가 달리듯 잽싸게 달아났다.
영은이는 누군가에게,
그것도 남학생에게서 뭔가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조잡한 수첩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다음날도 재억이는 자동차가 실린 카탈로그를 가져와서 영은이에게 보여주었다.
"니는 무슨 색이 좋나?"
"잘 모르겠는데."
영은이 반에는 자가용이 있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삼익비치에 사는 소영이네만 자가용이 있었다.
너무 먼 나라인 자동차의 세계였다.
그래서 영은이는 자동차 기종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자동차 색깔이 다 거기서 거기 같았다.
영은이의 관심을 받지 못한 재억이는 실망을 했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면 영은이에게 다가갈지 며칠간 고민을 하였다.
며칠 뒤, 영은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씻고 숙제를 하려는데 밖에는 누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은아, 호. 영. 은, 영은아 거기 있나!"
'누가 내 이름을 부르노?'
영은이 집 2층에서 현관 밖을 내려보니 재억이가 인형을 가지고서 서 있는 거다.
영은이를 보자마자,
재억이는 인형을 막 흔들었다.
영은이는 놀라다 못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과 불쾌함이었다.
영은이가 어쩔 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급기야 재억이는 그 인형을 영은이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영은아, 선물이다!"
그러고는 재억이는 또 도망가듯 달려갔다.
영은이는 동그랗게 괴물같이 생긴 그 인형이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부엌에 가서 곤로에 불 붙일 때 쓰는 성냥을 가져다가
불을 붙였다. 살짝 그슬리다가 불이 꺼져버렸다.
그 와중에 언니가 나와서 한 마디 던졌다.
"영은이 니 남자 친구 생깄나?"
"뭐라카노? 그런 거 없다 안카나. "
"가시나가 불나면 어짤라고?"
"알았다. 불 꺼져뿠다."
"고거는 우짤 건데?"
"뭐 이런 걸 주노? 짜증난대이."
영은이는 망가진 인형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평소 영은이의 눈에 비친 재억이는 지각도 자주 하고,
숙제도 안 하고, 늘 혼나고,
공부시간에 집중도 못하는 한심한 남자애였다.
거기다 이름 끝에 있는 '억'자도 마음에 안 들었다.
돈에 붙는 일억, 십억 말고는 '억'이 붙을 리는 없지 않은가.
영은이는 생각했다.
'공부도 잘하고 잘생긴 옆반 민수라면 어땠을까?'하고 말이다.
영은이는 학교에 가서 재억이를 보자마자
"재억이 니, 내가 좋나?"
영은이의 돌직구에 말문이 막힌 재억이는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순정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이후로 재억이는 영은이 옆으로 좀처럼 오지도 않았다.
영은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시한 놈은 필요 없대이, 남자친구 사절할란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게 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잘생긴 민수가
영은이에게 나타나서
"네가 호영은이가?"하고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호영은 맞는데, 와 그라노?"
"그냥 궁금해서 물었다. 전교에서 4개 틀린 아이가 니하고 나뿐이라서."
영은이의 마음은 다시 달라졌다.
남자친구 사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민수 정도면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