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알바생, 호영은
6월을 한글로 읽으면 [유월]이 된다.
나는 6월이 좋았다.
계절 중 6월과 10월은 읽을 때 받침이 빠져버린다.
발음하다 보니 불편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유월]을 발음하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신록이 푸르다 못해 초록초록하고
여기저기서 갖가지 꽃이 피고 졌다.
새들은 노래하고 캠퍼스의 낭만은 최고조로 달했다.
봄은 끝이 나서 아쉽지만
여름이 오고 있다는 건 곧 여름방학이 된다는 거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방학이 기다려지는 건 똑같았다.
정치학개론, 사회학개론, 경제학개론, 법학개론도
교직이수에 필수인 교육과정과 교육행정도
재미없고 따분했다. 주로는 주입식 교육이었고,
숙제만 늘 많았고, 교양과목조차 남학생들 많은 공대수업을 신청해서
괜히 다니기가 바쁘기만 했다. 누구 하나 대시하는 남학생도 없고,
내 눈에도 들어오는 학생도 없었다.
괜히 학과 선배말 듣고 공대수업을 신청해서 고생만 했다.
그래도 쥐도 새도 모르게 다들 짝을 지었다.
캠퍼스도 북새통을 이루던 3월과 4월을 지나
5월엔 둘둘씩 짝을 짓는 새들 마냥
여기저기서 캠퍼스 커플이 탄생했다.
그리 오래가는 커플을 보진 못했지만.
나는 동문에서 만난 말라깽이 재서랑
영화도 보러 가고 노래방에도 갔지만,
남학생의 꿍꿍이가 다 한결같아서 신물이 났다.
영화방에 가서 영화를 보는데, 본래 영화방이 영화 보라고 만든 방은 아니었던 듯.
아주 애정씬 연출하기 좋게 꾸며놓았다.
"영은아, 한 번만 안아볼까?"
"안 돼!"
나도 내 목소리에 놀라버렸다.
나는 쉬운 여자가 아니거든.
그러고 나서 우리의 관계는 시작되지도 못 한채 끝나버렸다.
안을 수 없다면 사귐의 의미는 재서에겐 없었다.
내가 큰 소리로 거절을 해서 재서 마음도 닫혀버렸다.
그러던 차에 나는 늘 마음에만 있던 아르바이트에 도전을 하고 싶어졌다.
캠퍼스 앞 상가지구에는 전봇대에 늘 갖가지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O2', 즉 산소였다.
전화를 하고 찾아가 보니
카페 가득 커다란 화분이 즐비해서
산소가 제대로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시간당 1.500원을 준다고 했고,
저녁 5시부터 11시까지 하기로 했다.
그날이 6월 셋째 주 금요일이라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말이 카페지, 세상물정 모르는 나, 호영은이었다.
돈가스도 식사로 팔고, 식사 시간이 지나면
맥주까지 나르는 호프가 되었다.
집에서도 엄마가 해주는 밥 먹을 줄만 알았지,
라면이나 끓여본 게 다인 나는
음식을 한 건 아니지만,
생전 처음으로 6시간을 서서
쉴 새도 없이 커피와 콜라와,
돈가스와 맥주를 날랐다.
나는 나르다가 컵을 깨버리기도 하고,
음식을 쏟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쟁반에 유리컵 10개를 올려서 힘없는 손과 팔고 나르는데
무리였다.
그런데 서빙보다 더 힘든 것은
복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오면 꼭
"저기요, 나 몇 살 같이 보여요?"
묻는 것이었다.
나는 뻔히 서른 살 같아 보여도
"신입생 같아 보이시는데요.",
"대학교 2학년 같아 보이시는데요."
그렇게 대답했다.
그 이유는 다들 젊어 보인다고 하면 웃으면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술에 취해 시뻘겋게 된 얼굴로
물어보는 그 인간들이 정말 싫었다.
가끔 사장 내외는 손님이 뜸한 이른 저녁 시간에는
돈가스를 저녁식사로 차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먹으면서도
'이래 가지고 장사되는 게 진짜 신기하네.'
이렇게 생각했다. 공장에서 찍어 나온 돈가스에
시판 소스로 얹고, 마카로니 조금과 양배추를 곁들인
돈가스는 참 볼품이 없었다.
간혹 돈가스를 서빙하면,
"에게, 너무 심하다. 이거 너무 부실한 거 아니에요?"
"아, 그러네요."
내가 달리 할 말도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11시까지 해야 되는데,
10시 30분이 되어 손님이 없으면,
사장님이 이제 가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참 친절하다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인사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아르바이트비에서 500원을 빼는 것이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손님이 없어도 약속된 알바시간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줄이다니.
내 부탁으로 교대해 주기로 한 친구가 바람을 놓는 바람에
내가 다시 카페에 가니 새로 알바생을 구해놓았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도 못해보고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 며칠 간의 경험은 너무나 소중했다.
롯데리아 불고기버거세트가 1.800원인데,
한 시간 일하고 햄버거세트도 못 먹는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비싼 함박스테이크는 8.000이니까 내가 6시간 꼬박 일해봐야,
함박스테이크와 콜라 한 잔도 먹기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학생회관에 가서
구직신청서를 넣었다.
담당자가 말하길,
"연락이 언제 갈지 모르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요."
"괜찮으니까 일단 넣을게요."
그랬다. 그런데 7월도 되기 전에 전화가 온 것이다.
여상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고,
영어와 수학을 해달라는데,
나는 영어는 자신이 있는데,
수학은 솔직히 힘들었다. 그래서 수학 대신에
국어를 하기로 하고 35만 원을 받기로 했다.
주 2회 2시간씩.
카페 알바에 비하면 이건 진짜 고액이었다.
그런데 식당 위 가정집을 꾸린 그 집은 너무도 열악했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아
방에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저절로 졸음이 왔다.
불은 어둡고 매캐하고
말할 수 없는 가난과 어둠이 느껴졌다.
여학생 어머니는 딸이 교대나 유아교육과에 갔으면 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그 학생을 그리 높은 점수가 필요한 대학에
넣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초가 안되어 있어서 중학교 1학년이 알만한 단어와 문장도 잘 알지 못하던 학생이었다.
그래서 몇 달 하다가
몸이 안 좋아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핑계를 대고 그만두었다.
진짜 그 집에서 과외하고부터 몸이 안 좋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영어교사이던 큰언니에게 과외자리가 들어왔다.
큰언니는 교사라 과외하는 것이 불법이기도 했고,
이제 대학생이 된 나에게 넘겨주었다.
큰언니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 댁 아들이었는데, 이름은'전 모세'였다.
이름은 성경 속 이름이나 성경을 전혀 읽지 않던 '전모세'였다.
그래서 나는 간도 크게, 주 3회 1시간씩 해달라는 걸,
주 2회 1시간 30분씩 하기로 하고 30만 원을 받게 되었다.
과외의 좋은 점은 선불이라는 것이었다.
목사님 댁에는 과외를 하러 갈 때마다 풍성한 과일이 있었다.
사과, 배, 포도, 복숭아 등 매번 최상품의 과일을 먹는 맛도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더 좋았던 것은 모세가 엄청 잘생긴 남학생에다,
실력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사실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과외하기 전에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모세는 2학기 중간고사에서 영어를 전교에서 1등을 해버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가르칠 게 없음을 깨달았다.
나도 영어과목에서 전교 1등은 못해봤기 때문에,
더 부끄러운 일을 당하기 전에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세는 패션센스도 좋아서 'Boy London' 브랜드의 핏 되는
멋진 티셔츠가 즐비했고, 예의가 바르고
훈남 그 자체였다.
그러다 보니 옷에도 신경이 쓰였다.
영은에게 옷이 많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사춘기 남학생이라 여름 복장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사모님은 백화점에서 자주 맛있는 음식을
사 와서 영은이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백화점 지하에서 사 온 만두나 피자도
너무 맛있었다.
과외에 익숙해질 무렵,
모세의 집에서 어느 날 발견한
조그만 바이올린을 보고
나는 모세에게 빌려달라고 하여
집에 들고 가서 열심히 소리를 내 보았다.
다시 돌려주고
그때부터 바이올린을 사서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을 하여 배우게 되었다.
얼마 못 가서 돈이 급해서 다시 되팔았지만 말이다.
나는 딱히 자신이 가난하거나 결핍이 많다고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모세를 보며 상대적으로 박탈감도 많이 느꼈다.
목사님 내외는 백화점에 자주 다니고,
항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집에서도 늘 텔레비전을 보고, 화나면 시끄럽게 욕하고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실망도 많이 하였다.
나는 가을 무렵, 같은 과 언니의 소개로
승마를 하는 학생에게 또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 학생은 자신이 값비싼 과외를 하기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업에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과외를 하면서도
그 학생 부모님 보기가 민망했다.
그 이외에도 몇 번의 과외를 더 하고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걸 말이다.
비싼 돈을 내는 만큼, 학부모들은
좋은 결과를 즉각 보기 원했고,
성적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가차 없이
알바생 신분인 나를 잘라버렸다.
그럴 땐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다가도
자신이 쓰다 버리는 소모품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이 든 학생이 눈물을 보이자 마음 약해진 나도 울어버렸다.
사실 나도 고등학교만 졸업했고, 대학생이라고 해봐야
교양이나 다른 과 수업 몇 개, 영어동아리나
토익클래스에 가서 영어를 조금 공부한 게 다인데 누구를 가르칠 입장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도 누구인지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나이 어린 남학생을 보고 설레는
소녀 같은 자신이
과외선생을 맡아 숱한 학생들과 만나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중에 영어강사가 된 나는
그래서 과외나 학원에 대한 신뢰가 크게 없었다.
어디서도 학생의 미래를 위하고,
존재 자체를 귀하게 느끼는 느낌을 못 받았다.
그냥 학원 돌아가게 하는 고마운 물주였을 뿐이었던 거다.
어쨌든 내가 카페에서 서빙도 해보고,
과외도 하면서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큰 노력 없이 쉽게만 돈 벌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니까.
물론 자신이 과외를 할 수 있는 선호도 있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감사하기도 했고,
한편 노력 대비 너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정보가 많지 않은 시대를 잘 만난 것일까.
알바생 호영은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