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양다리
지난봄, 채널A에서 청춘남녀의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 <하트시그널 시즌 2>가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포장마차에서 신나게 수다 떨던 동네 엄마들이 <하트시그널 2> 마지막 회가 시작되자 TV속으로 완전 빠져들었다. 김현우가 어쩌고 김도균이 어쩌고 완전 난리가 났다. 뻔한 포맷의 썸남썸녀 얘기가 그렇지 뭐... 하며 무심히 지나쳤다.
여름 즈음, 우연히 재방송을 보고 심장이 쫄깃해졌다. 어라, 연애는 쟤들이 하는데 왜 내 얼굴이 빨개지지? 8명의 남녀가 시그널 하우스에서 9주간 함께 살면서 하트 시그널을 보내고 받고, 꼬이고, 엉키면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마성의 매력남 김현우 셰프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임현주, 오영주 두 여자의 애를 태운다.
스물여섯, 아직 대학 4학년인 임현주는 연애 천재다. 연애박사들이 얘기하는 ‘두 발 자전거’ 론의 주인공이다. ‘잘한다 잘한다’ 믿고 손뼉 쳐 주면 두 발 자전거를 잘 타다가, 불안하면 넘어지는 남자 김현우의 마음을 결국 얻어낸다. 예쁘고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의 현주. 짧지만 이쁜 말들, 절제된 쿨함, 상대의 마음을 읽는 관찰. 멈춰야 할 때와 다가서야 할 때를 아는 그녀. ‘지금이 그 때야. 고삐를 벗어봐. 좋아해요 좋아해요...’ 주옥같은 현주의 어록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리얼리티를 살렸다. 이렇게 숨꼴깍하며 남의 연애 훔쳐보기를 즐기는 한편 마음이 씁쓸했다. 나도 한 때는 남편한테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였는데...
‘대화가 잘 통해서’ 결혼한 남편과는 대화할 때마다 다투게 되자 ‘대화 그게 뭐지' 모드로 바뀌었다. 그래 잘했어, 당신 멋져! 이런 멘트는 결혼 10년쯤 되니 사라져 버렸다. 울 서방님은 <하트시그널>에 빠진 나의 연애세포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고 하자, TV에 감정이입하지 말라면서도 흐뭇한 눈빛을 보낸다. 내 옆에 만져지는 남자가 당신밖에 없어하며 더듬으니 좋아한다. 남편과 밤에 양재천을 걷는데 웬 남자가 쳐다보며 실실 웃는다. 술 취했나? 했더니 남편이 ‘야, 너 거기 서!’ 고함을 지른다. 아휴, 민망하게 왜 소리를 지르냐며 말렸더니 내 여자를 희롱하는 놈을 가만두는 게 이상한 거라며 씩씩거린다. 오호, <하트시그널> 보며 내가 좀 살갑게 굴었나? 이 남자 거칠긴 해도 쫌 멋진데. 어라, 갱년기 아줌마 몸속에서 사망진단받은 연애세포들이 진짜 살아나기 시작한 건가?
나이 오십에 갱년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내 친구들은 세상에 뭘 해도 재미가 없다며 권태를 호소한다. 연애감정 그게 뭐였는지, 박물관에 가서 찾아봐야 하는 건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여행 갈 때마다 우려먹던 과거 연애담도 새로운 썸에 대한 일탈 욕망도 시큰둥, 더 이상 들출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삼십년 지기인 친구 K가 얼마 전 ‘두 남자에게 빠져 있다’고 고백을 했다.
한 남자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 또 다른 남자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무라카미 하루키. 귀로는 프레디의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는 하루키의 소설을 탐하며 한 마음에 두 남자를 품고 있단다. 칫, 제멋대로 골라잡아 양다리를 걸치셨구먼! 근데 고거 괜찮네. 내 맘대로 남자 골라서 연애 감정 유사한 설렘 세포를 자극하는 거. 해서, 나도 두 남자 골라봤다. 밤마다 <김영하 작가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팅을 들으며 잠이 든다. 산책할 때도,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도... 달달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에 푹 빠져있다. 다른 한 남자는 <백일의 낭군님>의 도경수. 뒤늦게 드라마 몰아보기 하며 아휴, 이 젊은이 왜 이렇게 귀여우면서 섹시한 거야! 오십 대 아줌마의 설렘 세포를 재생해 줘서 고마우이. 연애 세포 사망선고에 울적한 아줌마들이여, 모두 한번 해 보시라. 내 맘대로 골라잡아 양다리 걸치기, 그 재미가 쏠쏠하다.
김영하 책 읽는 시간_46.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