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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Dec 28. 2018

대상포진이 남긴 것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

그 아프다는 대상포진에 걸렸다. 평생 안 하던 짓을 하던 그 밤에 말이다. 냉동실에 쟁여둔 아로니아 3Kg와 유기농 설탕 3Kg를 휘휘 저어 잼을 만들었다. 공동육아 엄마들에게 선물하려고 다이소에서 병 30개를 사서 열탕 소독 했다. 몽글몽글 식감이 살아있는 아로니아 잼을 담고, 2년 전에 담근 매실 엑기스도 담으니 한 살림이다. 퇴근해서 저녁해 먹고 잼 만든다고 세 시간 넘게 서 있었을까. 샤워하려고 보니 배와 등에 보랏빛 물집이 올라왔다. 남편이 보더니 ‘대상포진이네.’ 그런다. 먼저 앓은 유경험자의 진단이다. 

저질체력 이여사!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를 하셨어요, 으이구.  


며칠 전부터 등이 아프길래 매트리스를 갈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때 이미 대상포진 증세가 있었던 거다. 그것도 모른 채 회사 일을 가열차게 하면서 무리한 잼 만들기로 빨간 버튼을 눌러버린 셈이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 영양 불량과 운동 부족도 한몫을 했다. 처음에 그럭저럭 봐줄만했던 보랏빛 수포는 점차 누런 고름이 가득 찬 농포로 바뀌었다. 농포가 굳어지고 그 껍질이 벗겨질 때가 통증의 하이라이트다. 흔히 대상포진의 고통이 산통에 버금간다고 한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대상포진의 통증이 전동 송곳 돌리는 것처럼 날카롭게 파고들며 몇 주간 지속된다는 점에서 한 수 위다. 


한 달간 서울성모병원 통증의학과에 다녔다. 3시에 퇴근하며 룰랄라 기분 좋게 갔는데,병원 침대에 누우면 상황이 확 달라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얀 시트를 뒤집어쓰고 신경 주사를 맞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뜨겁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귓등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대상포진의 터진 틈새로 눌려있던 몸과 마음의 독소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솨아 솨아 눈물 대포 맞으며.    


통증의학과 주사실은 매주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 갔을 때는 의료진들이 친절하고 따듯한 위로 있었다. 아픈 내 몸을 정성껏 돌봐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간호사들끼리 커튼 밖에서 수다 떠는 게 영 맘에 안 들었는데 말투에 짜증이 묻어있는 간호사 때문에 기분이 확 상했다. 말투, 눈빛, 손짓 하나에도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나의 민감함이 싫다. 좀 둔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오늘 주사 놓는 이 자는 초짜 인턴인가? 주사를 어디다 놓아야 할지 몰라 조심조심 조몰락조몰락, 주사를 놓고 있는 건지 뺀 건지 알 수가 없다. 내 몸뚱이를 이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 실력이 어떤지 알 수 없는 의사에게 맡겨도 되는 건지 불안해져서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한순간 한순간을 지켜달라고. 다시는 아파서 병원에 오지 않도록, 이렇게 아픈 주사 맞으며 불안에 떠는 일이 없도록 긍휼을 베푸시기를. 절대 스트레스 안 받고, 회사 일에 목숨 걸지 않고, 좋은 음식 골라 먹고, 건강 관리하겠나이다 오, 주여! 나 하나 눈 감으면 그만이지 하며 쉽게 죽음을 묵상했던 오만함을 용서하소서. 하루하루를 범사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겠나이다.

 

 7개월이 지났다. 무안하게도 고백처럼 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밀가루 음식도 자주 먹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투덜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한 생활 패턴이 한 꺼풀 벗겨졌다. 농포 껍질 벗겨진 후처럼 분홍빛 새 살이 돋았다. 우선, 대상포진 덕분에 체중이 3킬로 줄고 몸이 한결 건강해졌다. <병원 없는 세상, 음식 치료로 만든다> <서재걸의 해독주스> <사십 세부터는 식습관 바꿔야 산다> 등 건강 관련 책들을 읽고 실천사항을 메모했다. 독소 제거에 좋다는 과즙을 매일 아침 챙겨 마시고, 막힌 혈관을 씻어내는 야채도 매끼 먹는다. 주 5~6회 하던 외식을 줄이고 부지런히 집밥을 차린다. 점심시간에 30분씩 걷고 요가 수업도 빼먹지 않고 다닌다. 


직장 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0년간 달고 있던 보직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니 숨이 안 쉬어지던 증세가 사라졌다.

 

 무엇보다 열 살 배기 딸하고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대상포진으로 앓던 어느 밤에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대상포진 걸린 게 더 낫다고. 휴가도 자주 내고 랑 노는 시간이 많아서 좋다고. 그래 그래. 진작 이렇게 우리 딸하고 여유 있게 보낼걸. 엄마가 많이 미안해. 직장이 뭐라고 금쪽같은 내 새끼를 외롭게 했구나. 매일 회사에서 방전되고 집에 와서는 짜증 내며 못되게 굴었구나. 내 딴에는 조직의 위기를 극복한답시고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겠다고 혼신을 다했는데, 참 어리석었구나. 이제는 ‘내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흔들지 않는다’를 원칙으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잡고 있다. 딸내미와 나는 자기 전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졸리다고 누웠다가도 웃음보 터져서 깔깔깔, 하하하, 자는 시간이 자꾸 늦어진다.   


    대상포진이 남긴 선물이 하나 더 있다. 동네에 나를 ‘언니’라 부르는 사람이 생겼다. 한 동네에서 10년째 살고 있는데 언니 동생 하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이 많은 엄마다 보니 열 살쯤 어린 엄마들 대하기가 어색했다. 회사 중심으로 살다 보니 동네에서 가까이 지낼 필요를 크게 못 느꼈다. 학교 모임에 어쩌다 나가도 예의를 차리고 깍듯한 존댓말로 거리를 뒀다. 대상포진으로 집에서 쉬다 보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토록 척박한 인간관계라니,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산 걸까? 그때 마침 같은 반 재원이 엄마가 카톡을 보냈다. 언니, 대상포진 걸려서 아프시다면서요. 저도 작년에 대상포진 걸려서 많이 아팠어요. 뭐야, 나한테 언니라고 한 거야? 이거 레알 맞아? 그녀와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며 대상포진의 세계를 속속들이 나누었다. 처음 어떻게 발포가 됐는지, 어느 부위에 얼마나 퍼졌으며 얼마 만에 딱지가 떨어졌는지 등등. 이후 그녀의 집 베란다에 뻐꾸기가 낳은 알을 보러 가고 우리 집에서 딸아이들 요리 영상 찍어 유튜브에 올리며 친해졌다. 간혹 준비물 놓고 갈 때면 우리 딸내미 것까지 챙겨주는 고마운 동생이 하나 생겼다.

 

대상포진 이전과 이후로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시끄러운 경적을 울려줘서 고맙다. 앞만 보고 달렸던 질긴 내 습관에 브레이크를 걸어줘서 고맙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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