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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Jan 05. 2019

익숙한 것이 독이 될 때

밖으로 나가자

<사진 출처 : 월드아트오페라>


한 직장에 23년째 다니고 있는 내가 놀랍다. 내내 대학을 다녔다 치면 학위 다섯 개쯤 딸 수 있는 시간인데 이렇게 오래 다닐 줄은 미처 몰랐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이었던가? 장래 희망을 쓰는 시간에 PD, 동시통역사, 고고학자 세 가지를 적어냈다. 당시 MBC PD였던 사촌 오빠 책장에서 <신문과 방송> 잡지를 탐독하다 PD에 꽂혔다. 다양한 스텝들을 아울러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프로듀서. 이거야말로 내 심장이 뛰는 일! 그때부터 PD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 곁눈질하지 않고 달렸다. 물론, 직선 경로를 밟은 것은 아니다. 내 계획대로 움직여주는 삶 같은 건 없으니까.


방송사 입사 시험에 떨어져 취업 재수를 하던 중 유럽 배낭여행을 가게 됐고, 넓은 물에서 놀고 싶어 유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영어, 내 너를 정복하고 말리라 굳은 각오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숙사에 짐을 푼 첫날 독립기념일인줄도 모르고 쫄쫄 굶다가 저녁에 맥도널드 햄버거를 손에 쥐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떠난 지 3년 반 만에 학사와 석사 학위 두 개를 거머쥐고 당당히 귀국했다. 나의 당당함과는 관계없이 취업이 안 되어 영어학원 강사로 버티다 드디어 PD로 입사하던 날. 그날의 감격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불꽃놀이처럼 팡팡 멋졌다. 대학 졸업 7년 만에 꿈에 그리던 PD가 된 것이다. Dream comes true.

 

편성, 제작, 노동조합, 글로벌 마케팅, 기획...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20여 년이 흘렀다. PD가 되고 싶어 끙끙거렸던 시간만큼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일했다. 헤매고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이 어찌 없었겠나. 별나게 괴롭히는 선배 때문에 위경련으로 고생하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몇 장씩 기획안을 써내려 간 밤도 있었다. 방송 현업을 떠나 글로벌 마케팅으로 옮길 때는 고민도 많았지만 용기를 내 그 카드를 집어들었다. 홍콩, 브라질, 우크라이나 등 40여 개국에 출장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업도 많이 벌렸다. 팀장이 하드코어면 팀원들이 힘들다고 살살하라는 충고도 여러 번 받았다. 좌충우돌, 십년감수, 감개무량 등 여러 코스를 밟았지만 총합으로 보자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월급을 받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문득 호흡을 가다듬고 세상을 둘러보니 내 일터가 너무 익숙한 곳이 돼 버렸다. 새로운 사람을 궂이 안 만나도 별 지장이 없고, 불꽃 튀게 자기 계발을 안 해도 그럭저럭 굴러간다. 편안함을 느끼며 익숙한 데 머물고 싶어 하는 나를 본다. 영혼은 집에 모셔놓고 출근하는 월급쟁이, 왕년운운하는 꼰대 부장이 된 걸까? 직장 동료들 관계도 시큰둥하다. 아침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겠노라며 동료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축복했는데, 그 기도가 뚝 끊겼다. 같은 공간에서 20년 넘게 온갖 일 겪다 보니 눈빛만 봐도 속이 읽힌다. 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하는 서운함과 배신감도 느낀다. 그간 직장 동료들을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한 내 어리숙함에 놀란다. 일도 관계도 쭈구렁 할머니 젖가슴처럼 늘어졌다. 화들짝.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이렇게 고인 물로 있으면 썩는다고. 정신 차려, 이 친구야!

    


Lim AMC의 서정림 대표는 자기 일을 사랑하는 열정가다. 작년 여름, 한창 준비 중이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얘기를 신나게 하던 그녀의 표정이 아직 생생하다. 연극, 음악, 무용, 문학 장르를 넘나드는 융복합 문화공연 기획사 대표로 <레이디 맥베스>, <서안화차> 등 굵직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문화행사 총감독으로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몇 해 전 '문화가 있는 날'을 기획하던 회의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도자조각 전시와 현대 무용, 브라스 밴드 연주를 아우르는 <도자조각, 이유있는 외출> 작업을 같이 하며 가까워졌다.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내 자리가 꽃자리,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은 모든 순간이라 얘기하며 호흡이 짝짝 맞았다. 오십 대에 자기 일에 뜨겁게 심취해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자극제가 됐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프로듀싱하는 작품을 얘기하는데 나는 몇 년 새 부쩍 늙은 것 같아 울적하다.

 

익숙한 것이 독이 되는 시간에 와 있다. 이럴 때는 익숙한 것에 머무르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새로운 만남과 연대를 만들어 보자. 고인 물에 출렁출렁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자. 글쓰기는 그 물결의 시작이다. 『50일 주1회 글쓰기 모임』과 『하루 15분 필사』 모임을 시작했다. 다음 주부터 공대생의 심야서재님이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도 시작한다. 너무 익숙해서 징글징글한 미디어 분야도 10대 유튜버의 눈으로 새롭게 공부해 보려 한다. 향후 30년을 내다보며 콘텐츠가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싶다. 30년 전 PD가 되고 싶어 울렁이던 그 순간을 소환해 열정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다. 그래, 그리 하자. 그렇게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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