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M에서 72초 티비 성지환 대표를 만나다
순댓국 대신 ToM
지난주 Talks on Media(ToM)라는 미디어 강연에 참석했다. ToM은 디지털 미디어 연구의 선두 주자로 산학을 아울러 왕성한 스터디그룹을 운영해 온 조영신 박사와 그 일당들이 만든 프로젝트다. 몇 년 전 그의 페이스북에서 순댓국집 회동 사진을 보고 순댓국을 사랑하는 일인으로서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여태 그걸 못 했다. 우리 회사에서 조박사 초청 미디어 특강도 하고 국제방송 발전방안 회의에서도 만났지만, 정작 순댓국을 같이 먹을 기회가 없었다. ToM이 여느 컨퍼런스처럼 거대담론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미디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자리로 만들겠다는 취지가 맘에 들어 가 보기로 했다.
내가 제일 노땅인가?
1월 첫 주 월요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저녁에 선릉역 근처에 있는 북쌔즈를 찾았다. 2층 건물에 서점과 커피숍, 베이커리와 세미나실까지 두루 갖춘 복합문화공간이 제법 근사했다. 와일드 블루베리티를 홀짝이다 올리브 바게트를 뜯으며 둘러보니 5~60명쯤 모였다. 대부분 이삼십대인 것 같고 사십대도 드문드문 보인다. 아 뭐야, 설마 내가 제일 나이 많은 건 아니겠지? 오늘따라 출장이 있어 쟈켓을 입었는데 너무 노땅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젊은 열기 속에 혼자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10대 유튜버 관점으로 미디어를 새롭게 공부하자는 새해 결심이 중요한 거지 뭐...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이내 72초 TV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72초, 왜케 재밌는 거야
ToM 첫 모임에 72초 TV의 성지환 대표가 강의자로 나왔다. 72초 성지환 대표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후 IT 기반 공연사업을 하다가 2015년에 2월, 그저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72초 TV를 시작했다. ‘재밌고 새로운 것, 그게 뭐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뻔한 걸 뻔하지 않게, 관습화 된 것을 새삼스럽게 바꾼다는 실험 정신을 기반으로 ‘관습을 깨고 본질은 지키되 새로움을 더하는’ 영상을 만들어 왔다. 모임 전 ToM 오픈 채팅방에 ’ 나의 베스트 72초 콘텐츠‘라는 설문조사가 올라왔는데 내가 본 건 72초 드라마밖에 없었다. 오금실, 두 여자, 바나나 액츄얼리를 벼락치기로 몰아보는데 흐미~~ 완전 꿀잼이다. 지난 3년 내내 비상경영체제였던 회사 일에 시달리느라 짤방세계에 어두웠는데, 이건 너무 재밌잖아!
에미상 레드 카펫을 밟다
성지환 대표는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한 경험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2018년 에미상 ‘숏폼 시리즈’에 출품한 72초의 <신감독의 슬기로운 사생활>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캐나다 작품 2편, 칠레 1편과 함께 최종 4편 후보로 선정되어 Nominee medal을 받고 Nominee 패널 토크에 참석한 얘기를 들려줬다. 패널 토크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화두는 ‘숏폼 콘텐츠로 어떻게 돈을 버는가?’였다. 에미상의 명예와 떠들썩한 언론의 조명을 받지만 뭐니 뭐니 해도 돈 벌어 먹고사는 문제가 현실에서는 으뜸인 게다. 72초 TV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해외 시장에서도 굉장히 새롭고 재미있다는 반응을 받지만 수익화가 늘 숙제다. 그나마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PT 하며 비즈니스 기회를 찾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진다고. ‘재미는 있는데 이걸로 뭘 하지?’에 대한 고민은 콘텐츠가 축적되면서 조금씩 길을 찾아가고 있다. 당장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에미상 노미네이트는 전 세계 미디어 업계의 심장부에서 인싸 인증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며 성 대표가 살짝 웃는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의 색깔
강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떤 플레이어가 나타나든 대체할 수 없는 우리 색깔을 분명히 하는 쪽으로 가겠다’는 대목이다. 작년에 미디어 시장의 주축인 TV 진출을 위해 장편 드라마 제작을 검토하다가, 지금은 플랫폼 확장보다는 실험과 재미를 추구해 온 72초 만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TV가 여전히 미디어 시장의 중심일까 하는 회의도 이런 결정에 한몫을 했다.
나도 10년 동안 해외마케팅을 하면서 ‘우리 색깔 분명히 하기’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수많은 해외 콘텐츠 마켓과 케이블/위성/IPTV 전시회에 다녀올 때마다, 우리 매체의 색깔을 분명히 해야만 광활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위성방송으로 수 백, 수 천 개의 채널이 둥둥 떠 다니고 유튜브, 페이스북에서 동영상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사용자들이 우리 콘텐츠에 시간과 비용을 할애할 이유가 무엇일까?
색깔을 분명히 하겠다는 성 대표의 말이 욕심부리지 않고 ‘내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비쳐졌다. 거품 없이 단단하게 걸어 나가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의 다음 목표가 에미상과 칸 국제광고제에서 동시에 수상하는 것이라 하니 향후 72초의 방향성이 그려진다. 콘텐츠가 광고가 되고 광고 또한 콘텐츠 자체가 되는 세상이 이미 시작됐으니.
미디어 기업은 대체될 것이다
<신슬사>가 에미상에 노미네이트 된 의미는 미디어 권력이 분산되고 있는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슬사> 제작진에 전통적인 미디어 플레이어는 하나도 없다. 또한, 제작과 플랫폼을 소유한 방송국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미디어의 권력이 분산되고 있다고 72초 대표는 말한다. 전통 미디어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경고가 전혀 새롭지 않지만, 다시금 뼈가 저릿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별명으로 케이블 TV가 화려하게 출범한 지 25년. 한국의 위성방송과 콘텐츠가 미국, 중남미, 유럽까지 뻗어나가며 시장을 확대한 것도 10년이 넘었다. 이제 OTT와 모바일 콘텐츠 소비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전통 미디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을 모으는 콘텐츠는 ‘금 나와라 뚝딱’ 주문을 외운다고 나오는 게 아닌데 말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는 능력, 돈과 돈을 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결국 돈과 사람의 문제이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돈의 문제이다. 누가, 왜, 언제까지,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지불하면서 전통 미디어 기업을 유지하려고 할 것인가?
새로운 만남은 기분 좋은 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사람들과의 대화도 유쾌했다. MBC에서 임정 100주년 사업하는 40대 이규창님,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에서 사회공헌사업하는 20대 김혜원님과 소셜 임팩트, 코리빙, <90년생이 온다> 책과 <듣기만 해도 똑똑해지는 라디오> 팟캐스트까지 깨알 수다를 떨었다. 첫 만남에 이리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우리가 미디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공통분모 때문이리라. ToM의 두 번째 모임에는 ‘아이돌 영상 즐기며 돈 버는 어플’ , AiT의 김조한 이사가 강연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또 어떤 '미디어걱정'을 보탤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