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찾아서...
2014년 가을, 의대 본과 2년 차 의대생인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책상 앞에서 그냥 읽기에도 시간이 부치는 양의 전공 서적을 억지로 읽으며 야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가을'이라는 계절을 직접적으로 몸으로 체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필리핀엔 계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rainy season'과 'dry season', 다시 말해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데 한국의 가을은 필리핀의 '우기'에 해당한다.
어두운 자취방 안에서 스탠드를 켜 놓고 얄팍한 종이에 박힌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가던 중, 돌풍을 동반한 굵직한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창문을 응시하게 되었다. 비슷한 소리를 내 안에서 계속 들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막연하게만 들렸던 소리여서 줄곧 무시했는데 이 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으니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비에 얼룩진 창문엔 스탠드 조명에 반사된 내 얼굴이 빗물을 타고 일그러지고 있었다.
"인생의 궁극정인 목적은 행복이라던데, 난 행복하니?"
갑자기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는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새로운 도전들로 가득 채우고 싶었던 나의 20대가 이렇게 절반이나 뚝 지나가 버렸다는 걸 생각하니 억울함에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내가 원하는걸 이루겠다고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눈물 콧물 쏟으며 타지 생활을 한지도 7년째인데 이 애석한 공부는 끝을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제자리를 맴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아서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밀고 나가면 언젠간 무감각해질 줄 알았는데 결국 '타닥' 창문을 치는 빗소리와 함께 마음의 댐은 무너지고 숨겨놓았던 서운함 감정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 자신은 항상 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날 이기려고 노력할수록 '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했는데 그냥 자신감도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렇게 공부를 계속할 순 없어. 의사가 되고 싶다고? 지금 이 상태로 꿈을 이루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을 것 같아. 잃어버린 내 자아를 먼저 찾아야겠어!"
그리고선 바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 나 이번 학기 휴학할까 봐."
이렇게만 말씀드렸는데, "너가 그런 결정을 한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 그 까짓 거 일이 년 늦게 간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너무 급하게 마음먹지 마, 세영아. 천천히 가도 돼"라는 대답과 함께 흔쾌히 허락하여 주셨다.
"이번에 수영이한테 다녀올래? 수영이 졸업하면 이젠 가고 싶어도 어려울 거야." 엄마가 말씀하셨다.
"정말?"
수영이는 내 둘째 동생이다. 스위스에서 꼼꼼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던 동생이 어느덧 마지막 학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마침 졸업식 전에 3 주 정도의 방학이 있어 함께 여행을 다녀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사흘 만에 후딱 휴학계를 내고 혹시라도 변심할까 일주일도 안되어 스위스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한 달가량 유럽 국가를 조사하고 동생과 함께 밤 낮 없는 스카이프를 통해 의견을 조율하고 동선을 짰다.
하지만 나에게 이 여행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나 자신을 찾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