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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독일 (2)

<페트병으로 근사한 아침을 …>

by 오셍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왜 페트병을 품에 품고 다니지?”


한참 숯불 닭다리 하나와 독일 소시지 하나를 나눠먹고 있을 때, 때가 단단히 탄 털모자 (지금 생각해보면 페트와 메트 만화에 나온 페트의 모자와 비슷한)를귀까지 덮어쓰고 코를 찔찔 대며 어떤 기계 앞에 멈추는 노숙자 아저씨가 눈에 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보다 더 푸짐하고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는, 노숙자 이지만 노숙자 임을 의심케 하는 노숙자 아저씨를 목격하고 말았다. 뮌헨 기차역에 있는 푸드 코트는 가히 새로운 세계임이 확실했다. 혹시 페트병이나 캔을 넣으면 돈이 떨어지는 기계를 본 적 있는가?


독일에는 ‘판트 기계 (Pfand machine)’라고 재활용 환급제도로 생긴 기계가 있는데 언뜻 보면 겉은 드럼 세탁기를 닮았고 구멍은 이보다 작게, 큰 페트병이 들어갈 정도로 뚫린 기계가 있다. 거기에 노숙자 아저씨가 병을 넣으니까 기계가 넣은 페트병을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초 후에 짤짤이가 또로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통 0.25유로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300-400원 정도의 돈이 나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노숙자가 불쌍해 보이면 마시던 캔을 비운 후 벤치 위에 올려놓고 간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의 적선인 샘이다. 이렇게 한 품 크게 안아서 가져온 빈 병들을 분리하고 나면 한 끼 식사는 아주 푸짐하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노숙자 분은 우리는 사치라고 느낀, 식후 맥주까지 시켜서 드셨다. 이를 본 우리는 여행 내내 사고 버리기를 반복한 2L짜리 생수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너 통은 비워서 버렸는데 저 기계를 미리 알았더라면 1500원은 거뜬히 벌었을 것이다. 사실저 순간에도 생수통 하나를 들고 있기는 했지만 산지 얼마 안돼 물을 반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도 맑은 소리로 찰랑거리는 생수통을 쳐다보고 한참을 생각했지만 0.8유로에 산 우리의 생명의 물을 저 야만적인 기계에 뜯겨 0.25유로로 바꿔먹는 무식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독일에서 볼 수 있었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바로 아침에 찐한 커피보단 샛노란 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사람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노숙자 아저씨처럼…… 어머, 사람들이 어쩜 이렇게 독해?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나의 기막힌 현지 적응력 때문인가 아니면 짜고 기름진 독일산 소시지와 닭다리를 잘근잘근 씹고 있어서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우리 앞 테이블에 일 열로 앉아있는 사람들의 맥주에 눈이 고정되어있었다. 나중의 필요를 위해 당장의 욕구를 참기로 했지만, 고문과 같은 시간이었다.. 암.. 그렇고 말고..


“야,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쫌 해봐..”
“나도 독일은 잘..”
“이거 누르는 건가?” 삑!
“아닌가 봐.. 그럼 이건가..?” 삑!


우리는 기차여행을 하고 있다. 나라에서 나라로 넘어가는 기차는 타기 전에 항상 예약을 해야 하므로 아침을 먹고 먼저 기차 예약을 하러 지하철을 타고 밤기차를 예약하러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려면 기계에서 발권을 해야 되는데 영어로 되어있는 발권기지만 사용법을 모르니 낫 놓고 ‘ㄱ’도 모르는 판이 되어버렸다. 마침 옆 기계에서 발권을 하고 있던 키 큰 독일 언니야들 4명이 동정의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모르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모르면 다 언니다. 언니야들이 영어로 행선지를 물어봐 주고 차근차근 대신 발권을 해주어 무사히 티켓 2 장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타지에서 외국인에게 보여주는 그 조그만 친절은 한 나라의 인상을 다르게 할 뿐 아니라 그 사람 맘 속에 고이고이 간직되는 ‘고마움’이 된다. 고마워요 언니들 ~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게 없구나.. 이것이 다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아 받는 벌이다. 여행 일정이 다 짜여 있어도 힘든 것이 여행인데 갑자기 하루 전에 여행 계획이 싹 다 뒤집어질 줄이야. 감기는 감기대로 떨어지지 않고 대형으로 2 팩이나 사온 여행 티슈도 코 푸는데 다 썼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중학교 때 배웠던 ‘청산별곡’의 첫 소절이 생각났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중학생 때는 죽자고 작품 해석만 배우고 요상한 말 배운다고 그렇게 욕을 했는데, 정작 지금 시점이 되니 평생 다시 마주하지 않을 것 같았던 청산별곡이 떠오른다. 이 사람,,, 무슨 생각으로 이걸 썼는지 당최 알 수 없었는데, 정작 내가 고생하고 집을 생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왠지 구절을 반복할수록 측은해진다. 설마, 이 사람 이런 느낌으로 곡을 썼나.. 집 밥 먹고 싶다. 나도 다래 좋아하는데.. 이런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몸뚱이는 지하철을 나와 기차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

“안녕하세요, 숙녀 분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깔끔한 정장에 노란 머리까지 말끔하게 말아 올리신 여성이 우리를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 체코로 가는 밤 열차를 타고 싶어요. 밤에 떠나서 아침에 도착하는 거요.”
“기차에서 잠자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유감스럽지만 체코까지 가는 밤 열차는 없어요.”

잉?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

“독일에서 체코까지 가는 기차는 오후에 있고 저녁 도착이에요. 그런데 혹시 버스도 고려하고 계신가요? 버스로도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아요.”
“아.. 잠시만요.. 그 버스는 언제 출발이 가장 빠른데요? ”
“10시가 가장 근접한 시간 때입니다.” 직원 분은 능숙하게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시더니 곧바로 답변해주셨다.
“언니, 어떡할래? 언니는 독일 보고 싶어?”
“둘러보고 싶기는 하지.. 이왕 왔는데.. 근처에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도 가보고”
“근데 언니, 나적어도 내일 모래 아침까지 스위스로 돌아가야 되는 거 알지? 아침에 면접 봐야 된다고 난 말했다..” 듣기만 해도 빡빡한 계획이 답답한 듯이 말했다.
“아, 알지..”
“그런데 어차피 저녁까지 얼마 보지도 못해. 내 생각엔 프라하에 가서 오후부터 쭉 구경하는 게 어때? 프라하는 나라가 이렇게 크지 않아서 이동 시간도 적고, 내가 예전에 가봤는데 진짜 언니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 독일 꼭 보고 싶어? 나는 독일은 그렇게 안 끌리더라~ 베를린 장벽 있었던 곳 가서 뭐 할 건데. 그냥 빨리 체코 가서 느긋하게 구경하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술 같은 말들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속마음은, “아.. 그래, 수영이 말이 맞아. 지금 돌아다녀서 얼마나 보겠어. 독일에 뭐 볼게 있겠어?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곳을 왜 가려고 했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그래, 너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나 체코에서 갈 곳은 안 정해 놨는데 그럼 네가 가이드할래?”
“그럼~ 체코 진짜 좋아! 그리고 내일 스위스로 돌아가면 되겠다! 그렇지?”
“아, 으.. 응.. 응.. 그러네”

우리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며 이 기차 시간 저 기차 시간 이 버스 시간 저 버스 시간 알려달라고 여성 직원 분을 참으로 귀찮게 했지만 정말 신의 인내심을 가지신 이 분은 끝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기어코 오전 10시 버스를 예약했다. 다행히 이곳에도 유레일패스가 적용이 되어 예약비만 낼뿐 승차료는 부담하지 않았다. 짐 가방 들고 지하철을 타고 부리나케 달려 겨우 출발 10분 전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새벽에 도착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 보도를 걸으니 유난히 춥고 비커에 넣어 놓은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빗자루 탄 마녀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가 무거운 가방을 더 무겁게 하는 것 같았다. 불길해 불길해……

국경을 지나는 버스는 모두 이 층 버스로 되어 있었는데 버스 안에 조그만 스낵바도 있고 화장실도 있었다. 오스트리아나 헝가리로 떠나는 고속버스가 있을 정도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버스로 많은 나라를 다닐 수 있는 것 같았다.


끝에서 세 번째 버스가 우리 버스였다. 우리 자리는 버스 2층의 중간 자리였다.

“MerryChristmas~~” 겨울이어서 그런지 산타복을 입은 직원들이 승객들에게 31일까지 적혀있는 빨간 초콜릿 박스를 하나씩 나눠줬다. 후식이 필요했던 터라 앉자마자 초콜릿에 손이 갔다.
“이게 뭐지?” 하고 숫자 하나를 뜯었더니 하얗고 동그란 밀크 초콜릿이 나왔다
“우와~ 수영아! 코딱지다.. 크크크”
“이거 진짜 재미있다!”4줄로 되어있는 숫자들 중 1줄 당 딱 2개만 다크 초콜릿 코딱지였기 때문에 뽑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참 재미있게 숫자를 뜯어먹고 있었는데 늙은 노부부가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안녕하시오, 내 생각엔 여기가 우리 자리인 것 같지 말이지요.”
“네? 여기 저희 자리가 맞는데.. 여기 티켓 보세요!”
“오, 노노노~ 우리 티켓을 보세요. 제 생각엔 자네들 티켓 날짜는 오늘이 아닌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출발하기 3분 전에 알았다.


우리가 산,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 직원이 끊어준 티켓은, 오늘 티켓이 아닌 내일 티켓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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