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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오스트리아

<전투모드로변신 in 비엔나>

by 오셍

“ 여긴 어디지? 너무 추워…”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곳에 들리는 것은 기차가 달리는 소리뿐이었다. 텅 빈 상자 속에 들어온 것처럼 사물도 사람도 심지어 공기도 들어오길 꺼려하는 공간에 갇힌 것 같았다. 무서움 속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혼자가 아닐 것 같다는 강한 직감에 무심코 수영이의 이름을 불렀다.

“수영아! 수영아! 너 여깄어?”
“어! 언니! 나 여깄어!” 갑자기 빛 한 가락이 들어와 수영이의 눈을 비췄다.
“어떻게 된 거야.. 무서워서 혼났네..” 수영이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서서히 막히던 숨이 트였다.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어? 여기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주영이랑 혜영이도 있잖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또 다른 빛 네 가락이 기차의 천장 곳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이 지나가는 방향으로 눈을 돌려 보니 엄마도 아빠도, 주영이랑 혜영이도 기차에 타고 있었다.

“다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했다.
“어떻게 오긴, 우린 여기 계속 있었어.” 엄마는 별 일도 아니라는 듯 사과 모양을 따라 과도를 돌리시면서 사과를 깎고 계셨다.

기차의 온도는 따뜻한 봄 날씨로 바뀌었다. 각자를 비추고 있었던 빛이 점 점 더 강해져서 희미하게나마 내가 있던 공간을 밝혔다. 우리 집인 것 같았다.

“언니 언니~ 이거 봐! 주영 언니랑 수영 언니랑 종이접기 했다!” 6살 혜영이가 양 손에 엉성하게 접힌 종이배와 종이학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실제보다 몇 년씩은 어려져 있었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거야?” 엄마가 과일 깎는 옆에서 소설책을 보고 계시는 아빠한테 물었다.
“우리야 모르지. 네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아빠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드시고는 말씀하셨다.
“언니! 밖을 봐! 우리 하늘을 날고 있어!” 신이 난 9살 주영이가 창문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어디서 인지 흘러나오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따라 막춤을 추고 있었다. 익숙한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순간, 기차의 천장이 깨지고 빛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누워있던 왼쪽 침대 모서리에 놓인 스탠드 위로 올려 두었던 내 태블릿 알람을 끄면서 생각했다.

‘별 개꿈이 다 있네..’
그리고는 한참을 멍하니 꿈을 생각하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보고 싶긴 했나 보다… 우린 어딜 가고 있던 걸까?’
우리 가족만으로 따뜻해진 마음의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얼른 옷을 갈아입은 뒤 잠에 취해서 아직도 해롱거리는 수영이를 큰 소리로 불러서 깨웠다.

오늘은 정말 지옥 같은 스케줄을 견디고 집에 가야 한다.


아침 9시 30분에 프라하에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에서 한 번, 스위스 외각에서 한 번, 그리고 산을 올라가는 산악기차 (퍼니큘러) 까지 총 세 번 갈아타고 스위스로 가야 하는데 중간에 내려서 티켓을 끊으러 왔다 갔다 할 시간이 15분밖에 없는, 총세 번의 환승 중 감히 하나의 기차라도 제시간에 못 탄다면 오늘 안에 집에 도착할 수 없는, 그리고 기껏 도착해도 오후 11시나 되어야 하는, 정말 하드코어 스케줄이다. 호텔에서 훌륭한 아침 뷔페를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세영아~ 이리온~’

“수영아, 이렇게 까지 하고 오늘 꼭 집에 가야겠니?” 조식 뷔페에 나오는 요플레에 시리얼을 찍어 먹으며 울상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인터뷰라니까.. 나 취직 못하면 언니가 용돈 줄래?”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 두 개를 잼에 발라 겹친 것을 크게 한 입 베어 물면서 얘기했다.
“든든히 먹어둬라.. 이것이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어. 오늘 우리는 집에 간다.”
전투 모드로 변신.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기차는 여태껏 탔던 기차와 생김새가 달랐다. 왼쪽에 날씬한 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을 복도로 제외하고 기차 칸을 좀 두꺼운 플라스틱 벽이 8개의 방으로 나누며 이 방을 닫을 수 있는 미닫이 문이 달려있다. 방 안은 파란 의자가 왼쪽과 오른쪽에 각 각 4개씩 붙어 있어서 4명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형식이고 복도와 마주 보는 벽은 커다랗게 창문이 뚫려 있어서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있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기차와 매우 닮았기 때문에 이를 봤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유레일 패스 덕에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는 티켓을 사지 않아도 되었고 자리도 미정이라 아무 칸이나 문을 열고 타면 됐다. 천천히 복도를 지나가면서 플라스틱 뒤를 힐끗힐끗 점검한 뒤 사람이 없는 칸을 찾아 타기를 성공했다.

비수기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어디에 가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인데 정말로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우리 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 8명이 타는 공간에 퉁퉁한 가방을 베개 삼아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누웠다. 커다란 창문 밑에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조금 한 테이블이 붙어 있었는데 이 위에 태블릿을 놓고 저장해놨던 클래식과 함께 밖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저절로 배에서 코끼리 천 마리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났다. 내 배꼽시계의 정확성이란 어느 해시계나 물시계, 또는 그 어떤 스위스 장인의 정교함이 묻어난 시계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아침에 조식 뷔페를 먹으면서 눈치 보며 가져왔던 삶은 달걀 6개와 휴지에 싸온 구운 식빵 4조각을 꺼내 들었다. 또다시 ‘어글리 코리안’ 소리 들을 짓이지만 배낭 족에게 공짜 조식 뷔페란‘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남자와 사진 찍기 쿠폰’과도 맞바꿀 수 있는 유혹이었다. 구운 식빵에 스페인 여행에서 샀던 크림치즈를 바르고 들고 다니던 물통에 스페인 호스텔에서 가져왔던 레몬 티백을 넣고 열심히 흔들어서 음료도 준비했다. 중간중간에 삶은 달걀도 까먹으면서 수영이랑 얘기를 하고 있는데 ‘띠링’ 소리와 함께 아이폰에 알람이 왔다.

‘프라하 국경을 넘으셨습니다. 오스트리아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초원은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푸르고 넓다. 초록 잔디가 얼마나 고르고 빽빽하게 자라 있던지 초록 토끼털이 그 넓디넓은 초원을 다 덮은 듯했다. 초록 언덕 위에 지어진 하얗고 노란 집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 친구 클라라와 함께 뛰놀고 있을 것처럼 생겼고, 곳곳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은 초원 중간 어딘가에 네로와 파트라 슈가 앉아 얘기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만들었다. 미풍에도 미묘하게 반응하며 초록 파도를 만드는 잔디들을 보자니 하이든의 창의적인 생각과 세밀한 관찰력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7시간은 정말 길고 긴 시간이었다. 아무리 노래를 듣고 누워서 잠을 자다가 책을 읽고 푸른 초원을 감상해도 쉬이 가지 않는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시간은 갔고 4시 30분경, 오스트리아에 도착했다. 다음부턴 과감하게 미련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으리..

기차의 문이 열리기 전부터, 우리는 뛸 준비를 마쳤다.
“빨리, 빨리! 티켓 어디서 사!”
“언니, 여기래 여기! 뛰어!”

지금 생각하면 오스트리아를 구경하지 못하고 온 것이 정말 후회된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 많은 곳 뒤로 한채 발바닥에 연기가 날 정도로 달리고 있는 우리...

4시 40분에 가까스로 스위스행 기차 티켓을 끊었다. 10분 후 출발이라 다시 플랫폼까지 서둘러서 돌아가야 했다. 열나게 뛰어가고 있는데 어디서 고기 냄새가 물씬 실려 오는 게 아닌가.
“아니, 이건!” 내 발걸음을 단 번에 멈추게 하는 이 냄새는 그 유명한 비엔나 햄이었다.
“어, 햄! 오스트리아 햄! 비엔나 햄! 수영아~~ 햄!!!” 때마침 다시 배가 고팠었던 터라 햄을 사 먹자고 간절히 말했다.
“언니, 시간 없다니까! 아줌마, 햄 한 덩이 주세요.” 분명 오수영도 먹고 싶었다.
푸짐하게 햄 한 덩이를 잘라서 빵 사이에 끼워주셨다. 따뜻한 스팀을 계속 찌고 있어서 그 런지 햄이 스펀지 빵처럼 잘려나갔다. 햄이 얼마나 큰지 빵 두 쪽 사이에 끼워 주셨지만 사방으로 햄의 사각이다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아마 빵의 두 배만 했을 것이다. 이를 받자마자 잽싸게 플랫폼으로 뛰어와 우선 우리 좌석에 착석했다.

“으허흐허흥~~ 냄새, 수영아,, 냄새 맡아봐.. 하..”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유럽의 냄새 아니겠는가. 맛도 약간 매콤한 것이 이건 분명 한국 사람들을 겨냥하고 만든 것이 틀림없다. 제대로 된 햄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으나 칠리 궁시렁 햄이었던 것 같다. 씹는 맛도 초특급 A+ 한우 안심 스테이크 같아서 입에 가져다가 넣기만 하면 알아서 스르륵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 평생 이런 맛은 처음일세… (중간에 두꺼운게 햄)

기차에서 파는 콜라와 함께 하자니, 유럽에서 먹은 베스트 푸드 3위안에는 눈감고도 들어갈 맛이었다. 이리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우리의 유럽 여정은 거의 결말을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마다 압력 차이 때문에 막히는 귀를 뚫느라 하품하고 침 삼키고 별의별 행동을 다 하해서 멀미가 심하게 나곤 했는데, 이제는 이마저도 너무 익숙해져서 귀가 막혀도 시간이 지나면 뚫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귀찮은 행동들을 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마침내 오후 11시가 되어 드디어 크랑 몬타나(Crans-montana)에 도착한 우리는 고맙게도 차를 끌고 우리를 마중 나와 준 키 큰 룸메이트, 은서의 친절한 드라이브로 오전 12시가 조금 안된 시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우리의 도전은 실수투성이에 갈등도 있고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질 않았는데, 이 모든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그 당시에는 너무나 힘들고 가끔은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돌아보면 다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로 가득 찬 여행이었던 것 같다. 도전해서 얻은 실수는 경험이 되고, 경험들이 쌓여 인생의 한 장을 채우고, 한 장 한 장이 모여 나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을 때, 여행만 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We travel not to escape life, but for life not to escape us” – Anonymous
“여행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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