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아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곳 in 프라하>
-프라하 9시 뉴스-
“긴급 뉴스입니다. 어제 밤, 프라하 신가시의 어느 호텔에 난방을 최고치로 틀어놓고 나갔었던 미개한 한국인 배낭여행 족의 객실이 주최할 수 없이 뜨거워진 열기로 인해 불이 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무게를 잡고 얘기했다.
“이로 인해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호텔 측에 막대한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어딜 가도 무슨 일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우리의 여행기.
안타깝게도 우려와 다르게 정말 아무 일 없이 우리 방은 웬만한 온돌방 아랫목 못지않게 잘 데워졌다.
프라하에는 신시가시와 구시가시가 블타바 강으로 나뉘어 있고 이 위를 잇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는데 특히 소원을 들어준다는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스위스에서는 밤 8시면 벌써 온 마을에는 집에서 다 태워가는 장작 냄새로 가득 차고 이내 모두들 사랑하는 이에게 굿 나이트 키스를 선사하는 시간이다. 내 동생은 항상 말하곤 했다. ‘스위스는 젊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야.. 있었던 젊음마저 장작불과 함께 훨훨 날아갈 것 같아..’라고.
그러나 이 곳, 프라하는 밤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집이 있는지 없는지 사람들이 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오래간만에 밤의 기운을 듬뿍 받는가 보다. 내 동생의 눈이 아주 초롱초롱하다.
신시가시에 숙소를 얻었으므로 카를교까지 가기 위해서 약 30분 정도 걸어야 했으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로 중간중간에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활동적이게 돌아가고 있고 타악기나 현악기 등에 스피커를 연결해 작은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카를교에 발을 붙이기 전에 우리 눈에 띈 것은 바로 저 멀리 다리 넘어 구시가의 정 중앙에 우뚝 솟아 ‘나를 우러러보아라 백성들이여’를 외치고 있는 듯 한 프라하 성이었다.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나 초콜릿’에 둘러싸인 페레로, 또는 신림동 고시촌에 주차된 포르셰 정도의 느낌으로, 눈의 시신경이 붙어 있다면 저절로 시선이 그리 갈 수밖에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기적이게 혼자 돋보이려는 것들이 아니꼬워 한 번쯤은 무시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미개한 배낭여행 족일 뿐이고 그냥 지나쳐도 아쉬운 꼴을 보는 쪽은 내 쪽일 것이다. 그래서 특히나 겨울바람이 자주 애용하고 방문한다는 강다리 중간에 서서 이기적인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비록 사진은 매정한 바람에 날려서 안경에 끼인 앞머리와 목이 없는 생명체로 나왔지만 밤 조명에 빛나는 프라하 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나왔다. 사실 그 안은 별거 없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신비함, 또는 고귀함마저 없다면 이들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오래된 건물의 숙명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 길로 5분을 더 걸으니 카를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보행자 전용 ‘한강 다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넓었고, 한강 다리에 지나다니는 자동차 수만큼 관광객도, 그리고 현지인들도 많았다. 사실 낮, 또는 밤이라도 춥지 않은 계절에 오면이 곳은 초상화나 배경화 따위를 그려주는 화가나 오르간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 등, 많은 예술가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초겨울의 날씨를 보이고 있으므로 예술가 대신에 다리 양 쪽에, 세보지 않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약 30점 정도, 사람 크기보다 더 큰 조각상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조각상들은 60년에서 많게는 70년까지 관광객들에게 하나같은 표정을 지어주고 있다. 그래서 뭐, 우리한테 특별하게 웃어준 조각상은 없었던 것 같다만 모든 관광객에게 공평했을 테니 서운해하지 않겠다.
조각상 중에서 가장 ‘핫’한 조각상은 얀 네포무크 조각상인데 머리 위에 별이 5개 떠있는 조각상이다. 네포무크는 옛날 성인인데 왕비가 왕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바람을 피고 이 사람한테 고해성사를 했다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왕이 이를 알게 되고 네포무크한테 ‘사실을 말해달라’고 하지만 한번 손님은 영원한 손님. 손님의 비밀을 끝까지 지키다가 결국엔 카를교 밑으로 던져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에 ‘이 다리 위에 선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성인다운 유언을 남기게 되어 지금도 동상 기단에 새겨진 동판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있다. 실제로 동상 기단에 있는 등판을 보면 얼마나 반질반질한지, 장난인 사람도 있고 진지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염원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소원 비는 간절한 분들께 몰매 맞을까 두렵지만 여기에 500ml 비커로 찬물을 끼얹자면 지금 있는 조각상들은 다 짝퉁이다. 진품은 다 국립박물관에 모셔두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상을 찾고 진지하게 염원하는 사람에게는 진품 못지않은 수확이 있으리라 장담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나. 아멘.
카를교를 따라 구시가시에 다다르기까지 약 20분 정도를 걸은 것 같다. 확실히 구시가시는 신시가시와 확연히 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아..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좀 적극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아쉽다..”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 앓고 다녔던 감기가 계속 추워지는 날씨에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와 ‘배터리 충전이 필요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빨간 불을 정기적으로 깜빡이는 휴대폰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동생은 연신 감사기도를 드렸다. 언니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지금까지 왔다면 지금은 체코를 못 오는 것은 당연 지사고 자기가 앓아 누었을 것이라며, 아파서 다행임을 재차 강조했다.
몰인정한 녀석.. 흑흑
따지고 보면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구시가시는 테마가 있는 영어마을 같은 곳 이었다. 우둘투둘한 구불 길이 만나고 만나서 큰길을 만드는데, 그 큰길은 다시 구불 길로 나뉜다. 건물의 창문은 백설공주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 좋게 열어젖히며 노래를 할 것만 같다. 여기저기 럼주 통이 나뒹굴고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유럽풍의 문짝 또는 나무로 잘 짜인 커다란 문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똑같은 거리를 걸어서 돌아가야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펍 (Pub)에 들어가서 잠시 쉬면서 목을 축이기로 했다.
사실 체코는 맥주 소비량은 전 세계 최고라고 한다.
맥주의 나라라고 할 만큼 각 고장마다 특유의 맥주가 있고 국민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모닝커피 대신 모닝 맥주, 저녁은 따뜻한 티 대신 굿 나이트 맥주로 하루를 마감할 정도라고 한다. 구시가시에 유명한 생맥주 집이 있는데 이 집의 오픈 시간은 오후 2시지만 오후 4시에 강제로 문을 닫게 된다고 한다.
생맥주가 동이 나서.
이 정도면 괜찮은 반전 매력 아닐까? 이 도시, 알면 알수록 모순덩어리다.
우유 색과 우유 맛인데 알고 보니 마약인, 쉴 틈 없이 프라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니 왜 많은 예술인들이 프라하를 동경했는지 약간은 알 것 같다.
정말 미치광이 같은 도시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가? 여기는 사람들이 별로 안 돌아다니네?”
“9시니까 늦지...” 그래도 내가 고생했다고 맥주 한 잔은 허락하겠단다.
“저기, 문짝 특이한 집에 들어가 볼래?” 마침 우리 왼쪽 코너에 커다랗게 아치 모양으로 짜인 문짝이 보였다.
“야, 사람들이 다 어디 갔나 했더니 다 여기 모였구먼?” 북적거리는 내부 탓에 우리 목소리도 잘 안 들렸다. 여기저기서 피워대는 담배 때문에 부득이하게 형성된 구름으로 이미 눈이 메케하다.
“네~ 흡연석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금연석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바쁘게 우리 쪽으로 걸어오던 빨간 망토 소녀 복장의 여성이 채 우리한테 오기도 전부터 말을 걸었다.
아마 여기 직원복인가 보다. 세상에, 술집에 빨간 망토 의상이라니, 이건 무슨 동심 파괴야.
아무튼, 금연석으로 안내해 달라고 한 후, 급한 걸음으로 앞장서는 망토 언니의 뒤를 쫄래 쫄래 따라갔다. 우린 정말 단순하게 대문만 보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큰 펍(Pub)이었다.
대충 어림잡아 보기에 디귿자로 지어진 세 개의 건물이 복도로 이어진 것 같았는데 금연석은 복도를 두 번 지나는 가장 끝에 있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복도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을 안내받았다. 우리 앞에는 하물며 쌍둥이를 태운 쌍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외국인 부부가 있었다. 여자고 남자고,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일인용 밥솥만 한 맥주잔 하나씩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워낙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물컵 크기와 비슷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여기, 필스너 우르궈라는 맥주 진짜 유명해!” 밝은 개나리 색인데 거품이 아주 많이 나는 맥주다. 이 맥주의 포인트는 바로 이 고운 입자를 가진 부드러운 맥주 거품이라고 한다. 실제로 맥주 거품에 따라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많게는 맥주 컵의 75%가 거품인 것도 있다.
“난 흑맥주 마실래. 여기 흑맥주에 거품 25% 있는 거 이걸로..” 개인적으로 흑맥주 향을 좋아하기 때문에 필스너 궁시렁 대신 이를 선택하기로 했다.
“넌 안 마시냐?”
“응, 난 술 끊었어..”
“그래, 잘했어. 나 혼자서도 잘 마셔. 그럼 안주는 소시지 조림으로! (윙크)” 소시지 조림이 가장 쌌을 뿐 아니라 맥주와 소시지는 절대로 땔 수 없는 천생연분임을 알고 있었다. 맥주남이랑 소시지녀가 결혼하면 내가 주례도 봐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신뢰가 가는 커플이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반이 흐른 후, 남은 동전으로 거의 닫혀가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음식을 파는 아줌마 앞에서 갖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쇼부봐서 사 온 ‘더럽게 짜고 기름진’ 프라하식 부침개를 사들고 우리의 4성짜리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서 차갑게 식어버려 송장인지 사람인지 구별도 안됐던 손가락 끝으로 휘휘 저어서 온도를 확인한 후 치즈 퐁듀에 투하되는 한 알의 감자처럼 거대한 전신을 푸욱 빠뜨렸다. 얼은 몸이 따뜻한 물에서 흐물흐물해지는 것은 만화에서 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한 마리의 대왕문어처럼 욕조 안에서 흐물거렸다.
“아~따~~ 좋구먼…”
있었던 감기가 똑 떨어지는 느낌이다. 갑자기 우리 엄마 대사가 생각난다.
“감기야 훠~이~ 저기 김서방 내로 가라~”
전국의 미스터 킴이 감기 걸린 이유는 전국에서 미스터 킴에게 감기를 몰아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