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 킬링 문이 아니라 플라워 문의 킬러들
집 근처에 독일어 더빙 없이 영화를 상영해주는 곳이 딱 두 군데 있는데 한곳은 아바톤이고 다른 한 곳이 사보이 영화관이다. 여기는 영국 국립극장 연극도 상영해주는 등 영미권 영화와 연극을 상영해주는 곳이라서 왠지 가면 독일어를 전혀 안해도 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상영 시간표 등 여러가지 정보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은 기본. 이사를 온 이후로 여기에 참 자주 다녔다.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아바톤이라서 시간이 맞으면 아바톤으로 가곤 했는데 사보이 영화관이 훨씬 시설이 좋아서 가끔 여기를 선호하기도 한다.
몇주전 <베니스의 유령 살인사건>을 보다가 스콜세지 신작 광고를 보고 봐야지 하고 다짐했고 어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체휴가를 내고 보고 왔다. 조명을 못 받는 미국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그려서 흥미로웠고, 그리고 인간의 음흉한 욕망을 제대로 그려내서 흥미로웠다. 디카프리오 캐릭터 어니스트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점이 많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있지만 국제 관객은 잘 모르는 미국 1920년대 미국 남중부에 위치한 오세지 민족과 그들의 자치구역 오세지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당시 지역의 석유 발견이 여러 사람들을 지역으로 이끌었고 부유해진 오세지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은 범죄도 많이 일어났다. 이야기는 당시 오세지 국가에서 석유와 땅으로 부를 축적한 카일 가족을 타겟으로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고 로버트 드니로와 어니스트가 이들 가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벅하트 일가 역할을 한다.
실제 사건 그것도 흔히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소재로 다룬 점에서 흥미로웠지만 아쉬운 점도 몇가지 있었다. 일단 어니스트 벅하트의 캐릭터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때는 몰리 카일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중심 없이 삼촌 윌리엄 헤일 (로버트 드니로)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시키지도 않는 사고를 치고 다닌다. 몰리가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듯 하면서도 몰리가 고통에 몸부림치면 충성 넘치는 남편 역할을 수행한다. 삼촌에 대한 감정도 영화 내내 계속 변하는데, FBI와 협력한다고 했다가 협력 안한다고 바꾸는 등, 계속 가변적인 모습을 보여서 종최 캐릭터 속성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 또는 때로는 멍청한 것 같은 캐릭터를 디카프리오가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어니스트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처음에도 그는 여자라면 다 좋고 돈이면 다 좋다는 이야기를 했으니깐.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고 했는데 망한 케이스가 아닐지.
드니로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그야말로 찔러 피한방울도 안나올 것 같은 사이코패스적인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겉으로 온갖 좋은 역할을 하고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하면서 어니스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완벽하게 조종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는 딱 한가지 목표만 있는 것 같아 보였다 - 바로 카일 가족의 돈. 연령도 꽤 있고 자식도 없는데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하다. 조카 어니스트까지 위험에 빠뜨리면서 돈을 차지하려고 했으니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그저 돈과 권력이었을까? 아주 자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인종차별주의적이고 파렴치한 사고방식이 한몫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오세지 언어도 능통하게 하고 그 지역에 오세지 사람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던 그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었던건 깊이 내재된 혐오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었을까. 겉으로 이런 혐오를 절대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은 오늘날 인종차별과 혐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당시 백인들이 얼마나 무양심적으로 오세지 사람들에 대해 폭력을 가했는지가 자세히 나온다는 점이다. 오세지 사람들을 살인하는 장면들은 매우 냉정하게 그려진다. 돈에 눈이 먼 해일과 조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몰리 카일의 가족을 살인했다. 그 방법들도 잔인했는데 권총으로 쏴죽이거나 폭발물을 설치하는 등 전혀 양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그런 모습은 사실상 혐오 범죄에 거의 가까운 수준으로 보인다. 자신과 연인관계 였던 몰리의 여동생 안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바이런 벅하트는 얼굴에 표정하나 바뀌지 않으면서 안나 브라운을 어떻게 죽였는지 법정에서 증언한다. 잔인한 수법을 보면 해일과 벅하트네는 카일 가족을 그저 갈취와 폭력의 대상을 본 것 같다 - 이런 점을 스콜세지는 보여주고 싶었을 것 같다. 당시 오클라호마주 Tulsa에서 KKK가 흑인들을 학살하고 영화속 무대가 되는 지역에도 KKK가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보면 스콜세지는 그 사건들과 오세지 살인사건들의 유사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위기에 처한 몰리와 그녀의 동생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연방정부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이런 내용이다. 그렇듯 그들이 처한 현실은 그저 백인들에 의한 음흉한 학살 뿐이었을 것이다. 갈취당하고 죽임 당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몰리의 연기 덕분에 당시 오세지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런 핵심 메세지에도 불구하고 영화 런닝타임이 길어서 감독이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냉혈한적인 폭력도 드러나지만 어니스트와 일당이 몰래 작당을 하러 다니는 듯 그들의 범죄가 게임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특히 범죄가 탄로나는 부분은 모든 디테일을 살리기 어려워서 마치 멍청한 몇몇 일당들 때문에 탄로난 것 처럼 전달되고 코믹하게 그려지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영화가 길다 보니깐 핵심 메세지에 연출이 응집되는 느낌은 약한 편. 하지만 장편 영화니깐 그렇다고 치고 - 오랜만에 흥미로운 영화를 보게 되어서 기뻤다. 이렇게 자체 휴일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