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경계선과 지능에 대하여
나를 정말 잘 알고, 내 마음의 심연을 아는, 나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 말을 자주 한다. 그들은 나의 망아지 같은 극과 극의 모습을 보고, 늘 걱정을 하기에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할 때마다 저 말이 단골멘트이다. 하지만, 나를 잘 모르는 허주 같은 사람들은 나에게 가스라이팅하기 위해 저 한마디를 이용한다. 그 말인즉슨 '양날의 칼날'이라는 말이다. 오늘은 인간관계의 경계선을, 그리고 지능에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동물이다. 사회성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도록 유전자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진화론적 관점 혹은 유전자적으로 정말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팩트 체크는 인문학 혹은 과학 에세이를 참고하길 바란다.) 그래서 그런지 이타성을 보이는 사람이 지능이 높다고 한다. 특히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이 해당 무리에서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얘기다.
이 과학적 사실과 관계의 선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매우 높은 연관성이 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못하기에 자신의 언행이 무례함과 불쾌함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흔히 조언한답시고 막말을 자주 한다던가. 본인이나 똑바로 행동할 것이지, 지적질이나 잘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이다. 물론 나도 지적질을 잘하는 성격이지만,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20번 이상은 참다가 말하는 지적질과 본인이 불편하다고 바로 쏴버리는 지적질은 천지 차이다.
그러니까 무례한 사람들은 멍청하다는 얘기다. 무례함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 '태도나 말에 예의가 없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속된 욕으로) 졸라 이기적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기적인 사람은 IQ가 높든 안 높든, 학습 영역의 지능에 상관없이 멍청하다. 머리가 유독 나쁘다. 사회생활을 할 줄 몰라서 저지르는 실수와 매우 다른 차이를 보인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냐고? 그냥 대화하다 보면, “이 병신은 뭘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위인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멍청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적질을 참기만 하라는 건 아니다. 적재적소에 치고 빠질 줄 알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지적질과 사람의 단점부터 파악하는 게 태생이다. 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지적질과 쌍욕이 넘쳐흐른다. 그래서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단점이 수도 없이 보여도, 단 하나의 장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20번 이상 참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이런 나도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칼 같이 잘 끊어낸다. 예전에 유행했던 줄임말 중 “낄끼빠빠”를 기억하시길 바란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고’라는 이 줄임말은 인간관계를 아주 잘 표현한 말이다. 흔히 눈치를 잘 보는 사람, 그러니까 타인의 감정을 잘 읽어내는 사람이 이 능력이 아주 특화되어 있다. 나도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오감이 어릴 때부터 발달돼 있어서 그런지, 사람의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의 심연과 현재 감정 상태를 바로 알아챈다.
사람이 눈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무례함과 진심 어린 조언의 선을 잘 지킬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정말 안 좋게 이별했을 수도 있을 팀장님과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이유는 뭐냐고? 나는 사람의 인성, 그러니까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가에 초점을 두고 판단한다. 이 언니는 정말 유독 지나치게 자기반성을 해서, 오히려 자신을 깎아 먹는 사람인지라, 안 좋았던 사이였어도 돈독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이 언니에게 다시 한번 정말 진심 어린 조언을 들었다.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오지랖이고 건방질 수 있어서, 어제 나는 기도를 했어. 기도하면서 너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허락을 구했어.”라고 서두를 열더라. 그리곤 “나는 네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받았으면 좋겠고, 내가 아는 너는 정말 착하고 순둥한 아이인데, SNS 상의 너의 모습은 왜 낯설게 느껴질까. 나는 네가 욕을 좀 줄이고, 너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아는 너는 정말 그대로 완벽한 사람인데, 이제 너를 그만 깎아 먹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시더라. 이런 게 조언이다. 이런 게 인생 선배로서 할 수 있는 진심이라고 단언한다.
자, 이제 무례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대학 선배로부터 소개받은 친동생은 원나잇을 즐기는 위인이었고, 이 선배는 자신의 친동생과 관련된 사실을 2개월 간 만나고 헤어졌다고 공표한 날에 말하더라. 그것도 정말 안 좋게 헤어진 이유를 다 말을 했던 날인데 말이다. 연장자이니 이것까지는 참았다. 그리곤 내가 원하는 남성상을 SNS에 올린 적이 있는데, 바로 그 게시물을 보고는 “연애하지 마. 그런 남자는 없으니까.”라고 건방지게 충고질을 하더라. 본인 혈육이나 간수를 잘할 것이지, 왜 타인에게 선을 넘지? 내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 굉장히. 매우. 불쾌했다.
정말 쌍욕이 눈알까지 튀어나올 뻔했지만, 연장자이니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 왜냐면 나는 본인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께 예절을 칼 같이 배웠다. 그래서 내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하기 싫었기에 한 번은 참았다. 이런 사람들은 폐급 훈련소로 집합시켜서 정신 교육 좀 받고 나왔으면 좋겠다. 인간관계를 그 따위로 하니, 진실한 관계를 만들어 본 적이 없거나 다 떠나가고 없지 않을까? 선을 좀 지켰으면 좋겠는데, 멍청해서 그런지 그 경계선을 잘 모르더라.
이렇듯이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은 명백히 다르다. 자아성찰은 얼마나 내가 병신인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지하고 있는가인 반면, 자기반성은 자아성찰의 두 단계를 넘어,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고, 남들에게 사과할 줄 아는 힘이다. 나는 이걸 학창 시절 도덕책에서 '겸손함'이라고 배웠다.
사자성어 중에 ‘지숭예비(智崇禮卑)'라는 말이 있다.
“지혜는 숭고하여 자기를 높이는 것이고, 덕은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멍청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 한번 쉽게 말해주겠다.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방법은 겸손함이다.